너의 반짝이는 눈을 지켜줄게, 하고 감히 말하는 것도
그 무슨 만용이었을까.
도대체 그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16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28리터 대형 캐리어와 두 개의 짐짝 같은 큰 가방을 끌고 기차를 타고 감히 대구를 가겠다는 배짱을 부린 걸까. 만약 짐이 없었다고 치자. 그래도 어떻게 기차 안에서 아기와 두 시간을 버티겠다는 결심을 쉬이 했을까. 창 너머 지나가는 풍경은 빨랐고 진땀은 등줄기를 흘렀다. 승차시간이 아기의 배변 시간과 겹쳐 내내 아기의 엉덩이를 확인하고 기저귀 갈 수 있는 곳을 알아뒀다. 기차 세 칸을 지나야 하는군. 아니다. 네 칸이구나. 이곳저곳을 종횡무진하는 아이의 엉덩이를 신경 쓰며 졸졸 쫓아다녔다. 기차 칸의 문을 안 열어준다고, 누군가의 우산을 만지지 못하게 한다고, 자신을 내려달라고 칭얼대는 아기를 보며 생각했다. 난 참 분별없이 용감했구나. 이제 생각해 보니 창 너머는 보지도 못했고 진땀은 온몸으로 흘렀다. 그리고 아이는 어느샌가 모르는 타인을 따라 옆 칸으로 가려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몰라서다. 단 한 번도 일주일 치의 이인분의 짐을 들고 아기를 데리고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어서다. 아무것도 모른 난 기차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덜 마른 머리를 쓸어 올리는 여유를 부렸다. 심지어 가방엔 '혹시 모를' 책까지 한 권 들어 있었다. 오래된 습관 역시 때를 가릴 줄 모른다. 주인을 닮아 눈치가 없다. 눈치가 있다면 친구가 한 '아기랑 둘이서 기차를 탄다고?'의 말속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리고 기차에 오른 그다음부터일 것이다. 배웅해 준 그와 기차 문을 사이로 눈인사도 못할 만큼 바빠진 건. 정말이지 무지는 사람을 용감하게 한다.
기차 안에서 아이의 호기심은 폭발했다. 용암을 머금은 듯 이글이는 눈동자로 차가운 철의 표면과 구멍과 문을 탐색했다. 사람들은 줄 세운 의자에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잠에 빠졌다. 의자마다 고개를 들이밀고 싱긋이며 걸어 다니는 아윤이가 방해될까 들쳐 안고 기차 칸 사이로 향했다. 좁다 좁은 그 안의 세상도 아가에겐 신기한 것 투성이다. 모든 게 처음이고 모든 게 새롭다. 벽에 붙은 기차 칸의 숫자마저 아이에겐 놀라운 그림이다. 단순히 그 숫자를 소리 내어 읽어 주는 데도 까르르 웃는다. 이제 나는 이해하지도 알 수도 없는 세상이다.
숫자를 읽는 것만으로 즐거운 그 세상은.
외할머니 집에서도 아가는 자유롭다
모든 물체를 흥미롭게 만지고 보고 터트린다. 유물처럼 남겨진 집안 곳곳의 낡은 물건들이 아기의 손에 닿으면 새로 태어나 신기한 장난감이 된다. 눈에 띄지 않아 존재조차 몰랐던 사물들의 새로운 발견이다. 곧 끊어질 듯 닳아빠진 실타래는 살구 같은 손 위에서 색색의 꽃 줄이 되고 오백 년은 서랍에 박혀 있어 보이는 도널드 덕 열쇠고리는 찰랑이는 딸랑이가 된다. 내겐 별 볼일 없는 물건이 아가에겐 더없는 미지의 것이다. 촉감과 후각과 부딪힘으로 알아내야 할 탐구 거리다. 족히 스무 살은 가까이 되었을 '고양이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쫓아가고 또 쫓아간다. 노묘가 발톱을 세워 앞발을 들이대도 입을 잔뜩 벌리고 하악질을 해도 일절 상관 않는다.
아이에겐 세상에 금이 그어져 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고추와 옥수수와 깻잎이 천지이던 외할머니 집 마당의 흙을 이유도 없이 파고 , 길도 없는 뒷산을 뛰어놀았다. 20년은 넘었다던 수제 썰매와 한자가 가득한 일본어 책들, 용도를 알 수 없는 신기한 물건 투성이던 방구석구석 역시 되새겨낸다. 모든 게 모험이었고 흥미진진했다. 그때의 어른들은 모두 바빴던 탓에 누구도 나에게 '안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랬기에 난 온종일 책 속에 파묻혀 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멋대로 읽어대고 몇 시간을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산에서 뒹굴며 산딸기를 따 먹었을 것이다. 정해진 규칙과 할당량의 교육이 없었다. 안돼라는 말 대신에 소박한 밥상으로 큰 셈이다. 그래서인가 어쩐지 난 조금 헐렁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무탈하게 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던 내가 이제 인생을 조금 안다며 으스댄다.
그 물건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이제 그만 앉아서 쉬자.
볼 것도 없는 걸 갖고 왜 그래.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반짝이는 모험을 팽개치라 말한다. 내가 뭘 그리 안다고, 이제 막 피어나는 생의 세상에 금을 그으려 한다. 익숙해진 것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탓이다. 나 역시 세상 모든 것에 눈을 반짝여 놓고 왜 그 눈을 감으라 할까. 막는 대신 지켜보고 잡아주면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도 만용이다. 인생을 잘 안다는 만용.
난 어느새 잘 안다는 이유로, 혹은 모른다는 이유로 만용이 익숙한 어른이 된 건 아닐까.
사실 난 간밤 아이와 둘만의 여행이라며 설레었다. 아이의 처음을 함께 할 수 있어 기뻤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두 시간 동안 온통 날을 세우느라 지치긴 했지만 그대로도 좋았다는 마음이다. 지나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기차 좌석에 가만히 앉아 사색하는 16개월 아기란 또 그건 그것대로 걱정할 일 아닌가.
만약 누군가가 아윤이와 다시 한번 기차를 탈 것인가를 묻는다면 난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나도 조금은 날을 덜 세우고 창밖도 한번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생각이 든다.
난 어쩌면 만용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대책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라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