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5
보고 싶고 듣고 싶어 다니고 싶고 만나고 싶어
알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 영심이 영심이
『영심이』라는 제목의 한참 오래전 TV 애니메이션이 있다. 얼마나 오래전인가 하면 손자 손녀가 있는 나의 엄마가 이십 대일 시절이다. 당시 그녀의 별명이 영심이었다. 정수리에 가깝게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와 동그만 이마가 닮아서였을까. 잘은 모르지만 그녀도 그때는 청춘이었으니 천방지축 발랄함이 닮았던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주제곡이 얼마 전부터 입에 붙어 흥얼흥얼, 이 와중에도 따라 부르고 있다. 긴 이야기는 어디 가고 주제곡만 덩그러니 남아버린 몇 개의 만화 영화 가운데 하나다.
(그 외엔 '치키치키챠카챠카 초코초코쵸'로 남은 『날아라 슈퍼보드』와 '나디아, 너의 눈에는 희망찬 미래'라는 애매한 부분까지만 기억나는『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가 있습니다. 나디아의 눈에 비친 미래는 어떻게 되었다는 걸까요.)
노랫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14살 영심이의 마음이 내 것이라서다.
삼팔 청춘이나 되어가지고는 왜 이리 보고 싶고 듣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은지 초조한 마음마저 스멀스멀 인다. 하고픈 일을 잔뜩 쌓아두고 흘끔 곁눈질로만 보려니 감질 오른다. 언제 할 수 있을까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올해 반을 보냈다. 초조한 마음은 시간을 다그친다. 안 그래도 없는 시간을.
언젠가를 위해 겨울 동물이 곡식 저장하듯 시간을 모아 두면 어떨까
나는 한때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였다. 찬란함을 부정하던 찬란한 이십 대, 이년에 가까운 시간을 죽였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는 어떻게 나를 만드는가와 같다. 천천히 나 자신(시간)을 죽이며 박제해도 무한처럼 다가오는 시간에 공포를 느끼던 그 시절, 나는 어떤 나를 만들었을까. 견딜 수 없는 무력감과 피로를 어찌하지 못하고 근근이 돈을 벌며 가끔의 산책을 하고 대부분 잠에 빠지던 그동안 말이다.
저건 그때 든 생각이다. 지리한 시간이 사라지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이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았던 이유다. 분명 오늘이 아닌 내일엔 이 시간을 아까워할지도 몰라. 그럴 바엔 이 순간을 나중에 쓰는 거야. 뭐든 많을 때는 많아 탈이고 없으면 없어 문제니까.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가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돈으로 팔라고 꼬드기던 사람들 말이다.
가족과의 대화 시간,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 쓰는 시간, 자기 전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 책에서 그들이 말한 시간 낭비는 대체로 일상이었다. 만약 회색 신사가 현재의 나를 본다면 몇 년에 얼마라고 설득하진 않을까. 어떤 이득도 별다른 일도 없이 평온하게 흘려보내는 ‘우리’의 시간들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제법 아장거리며 걷게 된 아윤이는 이제 장난칠 줄도 안다. 내가 저를 힐끗 보며 씨익 웃으면 함께 씨익 웃는다. 잡으러 가는 척하면 서둘러 도망가는 척한다. 척하면 척하는 사이가 되어 꺄르르 웃고 지치면 드러눕는다. 그리곤 또 같이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들이 측정할 낭비의 시간이다.
'이 목적 없는 시간을 돈으로 환전해 아윤이가 어른이 된 시점에서 목돈을 만들어 주는 게 현명할 겁니다. 엄마와 딸의 시간, 두 명의 몫이니 돈을 두 배로 받을 수도 있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걸까. 만나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회색 신사의 말에 어깨를 움츠린다. 우리의 시간이 모두 부질없을까. 내가 보내는 이 시간은 모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결국 돈 주고 팔면 더 좋을 그런 것일까. 애초에 '시간이 없다'라고 외치는 내가 보내는 이 시간들은 도대체 뭘까. 사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나뿐만 아닌 모든 엄마들의 레퍼토리다. 해야 할 건 넘쳐나는데 시간은 정해져 있는 탓이다. 꼭 지금의 나처럼.
다시 생각해본다. 정말 내게는 시간이 없을까.
그렇다면 오늘 보낸 나의 시간은 누구의 것일까.
하고 싶은 일로 매 순간을 채우진 않지만 난 지금의 하루에 만족한다. 때론 고맙고 아마도 내 인생 가장 다정한 시간을 보내며 매일이 다르게 성장하는 아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읽고 싶던 책을 한 번에 내리읽는다 한들 원하는 수영을 한다 한들 미술관엘 간들 이토록 충만할 수 있을까. 끝까지 써내는 시간의 반의 반의 반이라도 채울 수 있을까.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과 오롯한 나의 것은 비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럴 수도 없다. 내 시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난 그 무엇보다 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아낀다).
다만 세상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지금 우리의 시간이 그렇다.
잠깐의 틈에 하는 것들은 더 꿀맛이고 한 장씩 읽게 되는 책도 결국은 완독을 한다. 둘 사이엔 약간의 시간차가 있을 뿐이다. 침잠하던 스물의 시간을 빼내 쓸 수 있다면 정녕 그 시절의 시간을 도려내 올 것인가. 그때의 것은 무의미했던가. 비우는 시간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생의 의미를 찾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본 성장통의 시간은 아니었을까. 그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오늘은 아무래도 의문과 생각으로 가득 찰 날인가 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은 내 안 어딘가 속소그레하게 모여있다.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고양이처럼 샐쭉 나를 바라본다. 손을 뻗어 한번 쓰다듬는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할 테니 염려 마.
좋은 건 사람이고 사물이고 시간을 내야 하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보고 싶고 듣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던 영심이는 77년생이니(그렇다고 합니다) 올해 43살이다.
29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얼 했을까. 여전히 좋아하는 것들 투성, 하고 싶은 일들 투성은 아닐까. 하고픈 일이란 건 매일 꾸는 꿈처럼 매일이고 가슴속에서 생겨나는 건 아닐까.
소녀가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줄곧 말이지.
또다시 생각이 실타래처럼 이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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