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초의 법칙과 진화론

씁후씁후 아니면 음파음파

by 윤신


화가 났을 때 스트레스 호르몬이 최정점에 달해 지속하는 시간은 15초라고 한다. 그리곤 이내 진정 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하니 첫 15초만 잘 넘기면 된다는 거다. 아기를 재우다가도 화가 나던 활화산 같던 시기(1시간 넘게 안고 서서 노래 부르던 때), 어디선가 읽고 머릿속에 저장해둔 일명 '15초의 법칙'이다.



법칙이라 하니 거창하지만 별거 없다. 15초 동안 '숨만' 쉬면 된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 행동도 하지 말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그저 두세 번 깊게 숨만 내쉬면 된다. 기나긴 육아의 하루에 비해 1/4 분은 얼마나 찰나인가. 아이가 악으로 떼를 써도 밥숟가락을 집어던져도 저지레를 수없이 해도 생각 까딱하지 말고 숨을 쉬라. 얼음 땡 놀이하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앉아서) 한 번쯤 배웠을 복식호흡을 하는 것이다. 쓰읍후 쓰읍후. 아니면 수영 시간에 배운 음파 호흡법도 괜찮다. 음파 음파.

어쨌든 요는 숨만 쉬는 데 있으니까.



오늘 하루 난 몇 번의 쓰읍 후와 음파를 했던가.

간신히 먹인 이유식을 모양 그대로 뱉어내고 촉감놀이용으로 사용할 때, 지 밥은 안 먹고 고양이 밥에만 관심을 보이고 호시탐탐 노릴 때, 이삼일에 한번 꼴로 고양이 물그릇을 엎고 그 바닥에서 뒹굴 때, 이유식 의자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려고 할 때, 밥만 먹이려 치면 철옹성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밥그릇을 엎을 때.



사실 보통은 그냥 '이 녀석!'하고 말지만 오늘 저녁은 달랐다. 화가 치밀어 오르다 오르다 냄비에 가득한 100의 물처럼 끓어 넘치려 했다. 순간 머릿속에 구겨져있던 필살기 같은 15초 법칙이 떠올랐다. 그 진상은 이렇다.

밥을 먹이려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치열한 싸움 뒤 결국 패배한 나는 의자와 바닥의 밥풀과 닭고기의 잔해를 치우고 청소기를 돌렸다. 밥풀로 끈적거리는 아가도 씻겼다. 물을 좋아하기에 보통 5-10분은 물놀이하듯 놀게 하는데 그 사이 난 쪼그려서 물을 뿌리고 찰랑이는 놀이기구 같은 역할을 한다. 그 후 아기에게 로션을 바르고 기저귀와 옷을 입혔는데 아마 이때 이미 난 방전되었던 것 같다. 아기를 잠시 바닥에서 놀게 하고 식탁 위 남은 그릇을 치우고 있는데 공기가 고요하다. 육아의 시간에서 정적과 침묵은 어딘가 불길하다. 바로 몸을 홱 돌려 아가를 찾으니 거실 끝 고양이 물그릇을 다 쏟고 제 옷도 흠뻑 젖은 녀석이 얕은 물을 참방이며 노는 게 보였다.

으아아아아아!

그때였다. 해종일 쌓인 피로와 화가 터지려다 15초가 떠오른 순간은.



사실 15초의 법칙을 생각해내기 전인 아침 열 시쯤엔 진화론에 대한 기록이 먼저 떠올랐다.

인류는 종족의 번식을 위해 아기의 외형을 '귀엽다고 느끼도록' 진화했다는 글이다. 아기가 생존을 위해 귀엽게 태어난다는 설과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 하지만 궁극엔 비슷한 맥락이다.

'그럼 그럼, 백 프로 귀여워서지. 귀여워서 봐주는 거야.'

아마 모든 아기 엄마들이 그렇지 않을까. 아기를 보살피는 데엔 책임도 있고 사랑도 있고 도덕도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체력과 정신의 한계에 실효적인 건 '귀여움'일 것이다.

쳇, 외모가 무기라더니.



물 바닥과 아기의 몸을 다시 닦고 기저귀와 옷을 갈아입히며 할 수 있는 가장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부교감 신경을 깨웠다. 야, 일해. 나 지금 마음 좀 가라앉혀야겠어. 쓰읍하 쓰읍하.

알고 있다. 사실 아윤이는 잘못이 없다. 제 호기심과 본능을 따르고, 싫다는 말을 대신하는 표현에 내 화가 일어나는 것뿐이다. 물론 이 무수한 뒤치다꺼리의 반복에 엄마의 마음이 화가 나는 게 잘못도 아니다. 그 화를 어떻게 풀고 잠재우는 가가 문제지.



킁킁이며 고래 숨을 쉬고 있는 내 곁에서 아윤이는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내 얼굴 한번 봤다가 힝힝거리다가 저기에서 장난치다가 다시 돌아와서 내 얼굴 보고 다리에 매달리더니 활짝 웃고. 몇 번의 긴 숨 뒤 아가를 반짝 안아 올려 끌어안는다. 활짝 핀 꽃처럼 웃는 아가다. 15초의 법칙이 통한 건지 아가의 웃음이 약인 건지 화의 'ㅎ'도 찾아볼 수 없다.

"미안해. 아윤이는 그냥 물이 좋았던 건데, 그치."



아가는 잠에 들고 오늘도 이렇게 지난다.

기억에서 15초의 법칙과 진화론을 꺼내 조용한 밤 한가운데 앉아 있다.

이왕 꺼낸 거 틈틈이 써먹어 볼일이다. 분명 내일도 그 15초가 필요한 순간 있을 테니까.



p.s. 그나저나,

너 얼굴 믿고 너무 그러는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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