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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25. 2023

그들은 각자 홍콩으로 제자리로, 어쩌면 달나라로

feat. White Gloves, Khruangbin



 도시의 빛이 빗물에 묻혀 어둡기보다 흐리다. 여자는 가로등 조명 아래, 하강하는 정어리 떼를 닮은 빗방울을 보며 어떤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황홀, 바다, 적막, 우아, 사치, 운율,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자 그녀가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들.


 트램이 지나는 도로 옆 그녀의 흰 폭스바겐에 비상등이 켜져 있다. 깜박깜박. 빛에 맞춰 반복적인 기계음은 마치 시계를 연상시킨다. 시간이 가고 있어.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뒤돌아 걷거나 그저 나처럼 눈을 깜박이는 게 고작일 거야,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찰나의 붉은 등은 고작 1미터를 지나지 못하고 사멸한다. 어둠으로, 태초에 혼돈과 공허가 섞여 있던 시작으로. 여자는 생각한다. 아니, 난 뒤돌거나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내려왔어?

 문 열어 줘.


 깜짝 놀라 조수석 바깥을 보니 남자가 비를 맞고 서있다. 철컥. 남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그대로 바닥에 두고 자리에 앉아 흠뻑 젖은 몸을 쓸어내린다. 여자의 자그마한 손도 뱅글팔찌를 찰랑거리며 남자를 털어준다.


 어머, 미안해. 깜박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만.

 새삼스럽게. 그래도 이렇게 비 올 때는 좀 참아줘.

 응, 응. 알았어. 뭐 마시러 갈래?

 아니, 괜찮아.

 그럼 근처에서 잠깐 얘기할까?

 좋을 대로.


 여자는 바다를 보러 가기로 한다. 번화한 길을 벗어나자 쭉 뻗은 이차선이 나온다. 잠든 도로를 깨우듯 여자의 차가 지나고 잠시 뒤척이나 싶던 도로는 다시 잠에 든다. 짖는 듯한 빗소리가 잦아들고 여자가 지역 라디오를 켜자 느린 템포의 무심하고 나른한 목소리와 기타 선율이 감미로운 White Gloves가 배경음처럼 흘러나온다. 여자는 볼륨을 높인다. Cause she was a fighter. She was a queen. She was a queen.


 엄마 노래네, 이거.

 무슨 말이야?

 그냥, 엄마한테 잘 어울린다고.


 여자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쓸데없는 말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데다 며칠간의 일정으로 조금 지쳐있기도 했다. 라디오 DJ의 낮은 음성이 고르는 노래와 함께 차는 시속 40km로 해변가에 다다랐다. 얼마 멀리 오지도 않았는 데 도시가 한참이나 멀어 보인다. 불투명한 스노우볼, 아니 레이니볼 속 작은 도시 같다.

 꽤 오래된 항구 곁 바다를 마주 보는 주차장에서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시동을 껐다. 냉기가 꺼지자 이내 덥고 습한 공기가 스멀스멀 차 안으로 몸을 들이댔다. 아직 여름은 전부 지나가지 않았다.


 고요하다. 밤바다는 해저처럼 어둡지만 거기서 오는 위안이 있다. 그러니까 시작, 태초에 잉태된 몸의 기억에 가까운 물과 어둠이 거기에 있다. 어떤 말도 없이 여자는 어둠을 남자는 물을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가 생각하는 물은 바다가 아닌 비다. 그는 차체를 때리는 빗소리를 듣다 어렸을 때 그녀와 함께 살던 주택에도 이런 류의 소리가 진동했다는 게 떠올랐다. 여자는 기분이 좋을 때면 남자가 그 비를 맞고 마당에서 노는 걸 허락했다. 더 기분이 좋다면 여자도 함께.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살지 않고 남자가 비를 맞고 차 앞에 서있어도 여자는 모르게 되었다. 물론 불평할 건 없다. 모든 건 변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비는 어디엔가 내리고 부딪히고 있다. 투둑 툭툭.


 하아. 남자는 문득 답답했다. 둘은 지금 십 분째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내내 침묵하고 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침대에 드러누워 쉬는 게 이득일 것이다. 사실 그는 근처에 있는 지역 대학의 졸업을 앞두고 있어 취업 준비, 과제, 시간제 일로 하루가 초단위로 빠듯하다. 흥, 또 사랑병에 빠져 몽롱한 누군가와는 다르지. 물론 남자는 그 생각을 발음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나 홍콩 다녀왔어.

 알아.


 여자는 다시금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남자가 다섯 살 즈음 여자는 새 남자를 만나 호주로 이사, 정확히 말하자면 이민을 왔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선택이기도 했다. 새 남자를 선택한 자신을 선택한 아이의 선택.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아이가 뭘 할 수 있겠냐고들 하지만 결국 인생이란 게 그런 거 아니냐고 여자는 말했다. 순간의 타이밍에 선택한 아주 사소한 결정으로 인생은 변하고 그 변한 인생은 모두 자신의 몫이라고. 그러나 자신의 선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는 것 역시 자신의 몫이니 절망할 건 없다고도 말했다. 여자는 정말이지 그렇게 살았다. 본인의 웃음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이후를 책임졌다. 도망치고 바람피운 남편들에게서 홀가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래서다. 그녀는 남은 가짓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이미 지난 일은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너도 그렇게 살아. 너 편한 대로. 여자는 늘 그렇게 말했고 남자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순 없어, 하고 대답하곤 했다.


 홍콩 가서 살 수도 있어.


 남자는 어떤 물음에 가까운 말을 하려다 참았다. 거의 그랬다. 여자가 말을 참듯 남자도 말을 아꼈다. 말로 수없이 서로를 상처 낸 결과 그들 사이엔 점점 침묵이 늘어났다.


 잘 됐네.


 여자가 새로 만나는 홍콩남자를 남자도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남자들과 다르게 몸집이 단단해 보이고 눈매가 또렷했다. 이번엔 좀 다를까 싶긴 했지만 또 모를 일이라 여겼다. 여자는 남자 보는 눈이 없었다. 그러면서 또 남자가 옆에서 떠난 적도 없었다. 엄마는 남자 없인 못살아? 고등학생 때인가 남자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대들었다. 그래! 못 산다! 여자는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런데 네가 뭘 알아?

 저 멀리 유람선인지 유조선인지가 지났다. 남자는 바다가 뿜어댈 포말을, 유속의 흐름을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시간을 생각해 봤자 남는 건 후회와 후회뿐이다.


 언제 가?

 아마 다음 달쯤. 하던 가게 정리하고 필요한 서류도 준비하고 하면 그쯤 될 거 같아. 넌 졸업하고 여기 살려고?

 그래야지. 내가 어딜 가.

 왜, 가려면 어디든 가지. 니가 원하면.


 남자가 어렸을 땐 그 말을 믿었다. 가려면 가지, 달나라라도 니가 원하면 가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었다.


 한 번 놀러 와, 나 정리되면.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여자는 얘는 또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남자는 쉴 새 없이 유리를 닦아내는 와이퍼를 보며 아, 엄마 같다, 저렇게 지치지도 않고 뭔갈 하면서 버티는 게, 하기야 나도 똑같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비는 거의 그치고 와이퍼도 멈췄다. 남자는 하품을 했고 여자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온 길을 되돌아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로 갈 것이다. 홍콩에, 제자리에, 달나라에 갈 것이다.


 도시가 참 예쁘네, 여자가 말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의 불빛이 발작적으로 아름다웠다. 색과 광도가 다른 빛들이 줄을 지어 형태를 이룬 모습이 마치 정렬된 은하수 같다고 그들은 얘기했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은하수 따위 본 적은 없었지만 그건 별 상관없었다.

 희뿌연 안개는 바닷가부터 그들을 졸졸 따라왔고 도시 역시 어둠이 아닌 흰 안개가 독차지하고 있다. 빛과 어둠의 자리에 습기만이 가득하다. 그녀의 차는 가로등 아래 같은 자리에 깜빡이를 켜고 다시 섰지만 이번에는 시동을 끄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나아갈 것이니까. 홍콩에, 제자리에, 달나라에. 둘은 머뭇거렸고 끝내 남자는 여자를 안았다. 이 밤이 지나면 그들은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다. 후회와 습관과 자존심과 익숙함이 그들의 만남을 방해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여자가 남자의 첫사랑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심히 가고, 가면 연락 줘.

 응, 그럴게.

 엄마.

 응.

 이번에는 좋은 사람 같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행복하라고. 난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여기 겨울이 되면 놀러 갈게.


 여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남자는 차의 잠금장치 버튼을 해제하고 차문을 잡았다.      


 나도.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알아. 그럼 나 갈게.


 남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집어 들고 건물로 향했고 여자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키가 훌쩍 크고 잘생긴 청년의 뒷모습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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