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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Aug 14. 2023

깊은 잠을 잘 거야

feat. 무릎, 아이유


 졸려?

 응.

 그럼 끊을까?

 아니. 이야기해 줘.

 어떤?

 그냥 아무거나. 아무 이야기나 다.

 그럴까, 그럼.



 있지. 할머니는 매번 졸리냐는 말을 '잠 오나?'하고 말했어. 아가, 잠 오나, 인자 잠이 오나 하고 말야. 난 그때 이미 아가도 아니고 잠도 오지 않았는데, 막 상상이 되는 거야. 잠이라는 형태의 어떤 형상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모습이 말이야. 어쩐지 할머니처럼 고무줄 바지를 입고 꽃무늬 티셔츠를 입은 잠이 어이 어이, 내가 왔어하고 나를 부르는 거지. 웃기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때면 잠이 무섭지가 않은 거야. 난 매일밤과 잠이 무서웠거든. 밤은 한참 길고 모두가 잠든 밤에 나 혼자만 우두커니 깨어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무서울 정도로 외로웠어. 누구라도 흔들어 깨우고 싶을 정도로.



 지금도 밤과 잠이 무서워?



 음, 아니. 지금은 좀 달라. 어른이 되고 밤은 무섭지가 않은데 잠은 여전해. 집에 들어오는 길 슈퍼에서 물 하나 사기 힘들 정도로 지친 날도 잠들기가 힘들달까. 몇 시간이고 눈을 뜨고 방 천장이 희붐할 때까지 보다가 이게 맞나, 난 뭐가 문제일까 생각하지.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도 단 한 번 주연인 적 없는 이런 삶이 맞는 건지 말야. 난 이렇게 태어났나 보다, 그냥 별 볼 일 없는 조연으로 지나가는 행인으로 살아가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잠이 들고 멍한 얼굴로 아침을 맞는 거야. 반복이지. 끝이랄 게 없어도 시작은 변함없는. 그러다 얼마 전 할머니의 기일에 할머니 사진을 보다가 그 말이 생각난 거야.

 잠 오나, 아가. 인자 좀 잠이 오나.

 그즈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쯤 찾아왔는데 그날은 다 같이 다슬기를 봉지 하나 가득 잡은 날이었어. 해 질 녘쯤 정강이까지 바지를 걷고는 찰랑이는 수면아래 크고 작은 돌들을 뒤집으며 여깄다! 하고 까만 봉지에 하나둘 넣는 거야. 꽤 많은 다슬기를 잡고서 작은 평상에 할머니가 앉고 나는 그 무릎에 누웠지. 사진 속 할머니는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으면서 오른손으로는 내 머리칼을, 왼손으로는 손부채로 내 몸을 쓸고 있어. 삼십 분은 잤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사진 속 내 얼굴이 얼마나 편해 보이는지. 잔바람이 발개진 뺨에 닿고 물소리가 시원했던 것 같아.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 들뜬 마음은 안심으로 바뀌고 마냥 좋았어. 아마 할머니도 그랬을 거야. 사진 속 얼굴이 그래. 지금도 그 얼굴이면 좋겠다, 우리 할머니.

 까만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실컷 까불고 그들은 웃었지. 나는 아직 어렸고 그게 그들에게 위안이 된 지도 몰라.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밤이 될 때까지 우린 그저 웃었어.



근데 이런 얘기 재미없지.

아니야. 더 듣고 싶어.

설마.

정말이야. 조금만, 조금만 더 해줘.

음.


 어떤 날은 자다가 깨서 펑펑 운 적이 있어. 엄마가 갑자기 날 잊으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한 달에 한 번은 너무 길고 무서워서,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무릎을 껴안고 울었어. 아마 할머니도 놀랐을 거야. 계속 우는 나를 껴안고 등을 쓸어내리셨어. 괜찮다. 다 괜찮다. 울음이 잦아들 때쯤 왜 그러냐고 물으셨는데 대답을 못하겠는 거야. 엄마 얘기를 하면 할머니가 걱정할 거 같았나 봐. 그래서 그냥 모르겠다고, 나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 할머니는 겨울띠가 생길라고 그런다,라고 하셨어. 사람도 조금씩 클 때마다 물고기처럼 몸에 보이지 않는 비늘이 생긴다고, 나이나 시간에 상관없이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아주 조그맣고 투명한 비늘이 늘어난다고, 네가 큰다고 그런다, 아가 그러니까 괜찮다. 다들 그런기다.

 나는 어느새 울음을 그쳤어. 그 말이 위안이 된지도 몰라. 난 정말 어른이 되고 싶었거든. 나 때문에 엄마도 할머니도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일 인분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사실 모르겠어. 어른이라 불리는 지금도 내 몫을 잘하고 있는 걸까, 의심이 들어. 나는 분명 어른인데도 불분명한 것투성이고 울고 싶을 때가 많아. 그럴 용기가 없을 뿐.



 너희 할머니가 옆에 계셨으면 괜찮다, 다들 그렇다 말하셨을 거야. 너는 아직도 자라고 있다고 네 등을 쓸어내리셨을 거야.

 맞아. 그러셨을 거야.

 그런데 너는?

 응?

 너는 이제 잠이 와?

 아직.



 자, 잘 들어. 잠이 너에게 가고 있어. 빨간 양말 신고 검은 잔꽃 무늬 고무줄 바지 입고 저벅저벅 너에게 가고 있어. 어이, 오랜만이다 인사하면서. 그리고 넌 아주 깊은 잠을 잘 거야. 할머니를 쏙 닮은 친근한 잠이 너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머리칼을 쓸어 넘겨줄 거야. 정말이야. 스르르르, 넌 깊은 잠을 잘 거야. 더 이상 밤이 무섭지 않은 것처럼 잠도 네 편이거든. 그러니까 괜찮아. 잠이 네게 가고 있어. 그리고 넌 잠이 들 거야.

 그것도 아주 아주 깊은 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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