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에 십이월의 사람들에게 쓴 글, 잡지 wake me up 기고
잘 지내고 있나요. 1 2월의 공기는 여전히 차고 사람들의 흰 입김도 늘 그랬던 것처럼 서둘러 어디론가 가고 있나요. 겨울의 가벼운 햇빛이 느리지만 공평히 아침을 깨우기 전, 아직 어두운 새벽을 맞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발끝에 걸린 이불을 코끝까지 당기며 시간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을, 그래도 이내 털고 일어나 선뜻 기지개를 켤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은 눈을 비비며 창 밖을 보겠지요. 어젯밤 유독 공기가 일렁이나 싶더니 어느샌가 얇은 눈이 쌓여 있을지도 몰라요. 묽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의 눈은 어떤 색에 가까울까요. 저기 어제 멈춰 선 자리에 버스가 다시 섭니다. 버스도, 살짝 언 도보를 걷는 사람들도, 그리고 당신도 어제와 조금 다른, 그러나 여전히 십이월인 하루를 살아갑니다. 눈이 오거나 햇빛이 가득한 날씨와 상관없이 정해진 정류장에서 멈추고 사람을 만나고 다시 자기 몫의 길을 달리는 일상을요.
그렇게 생각하면 12월의 아침도 나의 것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지금 내 방에 들어오는 아침의 빛이 조금 더 이르고 여기엔 오렌지 빛 메리골드가 피어있다는 게 다를까, 하고 말이에요.
저는 지금 9월의 이른 가을에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름인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에요. 쟁쟁하게 울리던 초록의 잎도 잠시 숨을 고르고, 녹아내릴 것 같던 한낮의 온도도 적당히 서늘해요. 지나갈 것 같지 않던 사건과 시간은 계절과 함께 흐르고, 모두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마저도 어김없이 지나갑니다. 또 어쩌면 날씨처럼 변덕을 부리다 계절처럼 돌아오겠지요.
조금 이르지만 어제는 월동 준비를 하듯 물건을 샀습니다. 몇 년째 겨울이면 곁에 두는 로네펠트사의 겨울꿈 winterdream이라는 차를 네다섯 상자 찬장에 채워 넣고 티백 몇 개쯤 가방에 챙겨두어요. 텀블러에 내가 마실 때도 있지만 가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기도 합니다. 시나몬과 만다린 껍질이 들어간 루이보스 향이 주는, 익숙한 위로가 잠시 스치듯 만나는 이들에게도 따스하게 닿길 바라요. 아무래도 그런 것들이 우리 사이의 온기를 지켜준다고 믿습니다. 따뜻한 물에 퍼지는 붉은빛과 겨울의 향. 제 겨울의 한 조각 모양이에요.
당신의 12월은 제가 아직 모르는 시간입니다. 지나온 십이월들과 같지 않고 제 앞에 놓인 것과도 같지 않을 미지의 시간이지요. 어쩔 수 없이 십이월은 구월과도 오월과도 다릅니다. 일 년의 마지막 달이 주는 어감은 꽤나 무거워요. ‘아직은’이라는 기대보다 ‘이제는’이라는 정리의 말이 더 가깝고 미뤄둔 생각과 사람들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려와 어쩐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만 됩니다. 저에게 십이월은 포기할 때와 아직일 때가 늘 헷갈리고, 연 초의 기대와 다짐은 어느새 낡아 쿰쿰한 헌책 냄새가 나는 그런 느낌이에요.
환하고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나 그 아래의 선물 포장보다 뜯어지고 남겨진 한 장의 달력을 보는 사람, 곧 다가올 내년의 설렘이나 기대보다 지나가버린 것들에 마음을 두는 사람, 소란한 가운데 침잠하고 고요한 시간을 바라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한 해의 낡은 목표를 생각합니다. 올해의 것은 시 열 편 외우기였어요. 사실 옷과 가방 사지 않기라는 목록도 있었지만 연 분홍색 부드러운 체크 목도리를 본 1월부터 바로 해제되어 부끄러운 마음에 일단은 내년으로 미뤄두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단호한 ‘사지 않기’보다 설렁한 ‘한 달에 하나씩 사기’ 정도로 타협해야 할까 고려하고 있어요. 이루려는 목표가 현실과 너무 떨어져 있으면 연말의 불꽃놀이처럼 순간으로 타오르고 사라질지도 모르니까요.
시를 이야기하자면 시작은 이래요. 어느 다큐에서 나이 든 어부가 바다의 흔들리는 고깃배 위에서 시를 읊는 장면을 봤습니다. 어부의 얼굴은 바닷바람이 거칠게 남았고 머리나 옷도 간편해요. 꿈에 대한 질문에 그는 시로 대답을 하고 있었어요. 제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시를 이어 붙이지요. 꿈을 꿈으로 두지 않고 꿈을 발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낭만을 닮고 싶었어요. 혼자 걷는 숲길이나 모두가 잠든 시간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는 어떨까 하고요. 나의 발음이, 발음되는 구절이 오로지 나를 위한 가벼운 위안이 될 거라고요. 물론 구월이 된 지금껏 외운 시는 하나도 없습니다. 가방이나 책상, 식탁에 시집을 가까이 두긴 했지만 먼 사람을 만나듯 시의 집에서 빼내어 가끔 한편씩 만났을 뿐이거든요. 아마 이 역시도 내년으로 미루지 않을까, 날씨처럼 미리 예측합니다. 어쩌면 다섯 편으로 줄어든 채로요.
올해도 어김없이 목표들은 흐트러지고 분해되고 맙니다. 하지만 역시 지난 것은 지난 대로 두기로 해요. 일월의 다짐은 일월에 두는 거예요. 구월엔 구월의, 십이월엔 십이월의 다짐이 있을 테지요. 낮과 밤이 반복되듯 우리의 다짐도 반복되는 것뿐이라고, 속 편하게도 일단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완성은 미완성대로 두고 다시 이어가면 된다고. 분명 그 시작점의 위치는, 임계점은 달라져 있을 거라 믿으면서요. 그리고 저는 당신의 십이월이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치게 무겁지도 마냥 가볍지도 않은 당신만큼의 무게를 지녔으면 좋겠어요. 중심을 버티고 설만큼의 중력을 받고 가끔은 달리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숨이 차고 지친 날이면 또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시시하지만 별 것 아닌 것들, 꿈보다 더 쉽게 망각되어 버리는 것들을요.
정오의 낮잠, 뜨거운 샤워, 곁에 있는 사람, 장작이 타는 소리 어느 날의 저녁노을, 언젠가의 꿈, 가벼운 스트레칭, 뜨겁게 우린 차나 커피, 귤 한 봉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 주말 산책, 푹 익힌 토마토 스튜, 어릴 적 동네 골목, 작고 따뜻한 손바닥, 뺨에 닿는 바람.
이 작고 사소한 것들은 분명 당신에게 가닿겠지요. 당신의 피부로 근육으로 피로 몽글몽글 따스히 스며들고 당신의 얼굴은 고요하고 조용히 웃게 됩니다. 그렇게 12월을 보내주는 거예요. 괜찮아, 지금으로도 충분해. 당신과 작은 것들을 위해 기도하면서요.
새벽에 비가 오더니 제법 공기가 차갑습니다. 겨울은 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계절을 지나 곧 십이월에서 만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추신.
일 년이란 겨울로 시작해 다시 겨울로 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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