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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다음의 초록

by 윤신



길가에 서 있는 나무란 플라타너스뿐이라고 생각하던 여름

손바닥보다 큰 초록의 마음들이 흔들리다 떨어지고


열일곱 여자 아이들이 담을 넘어

산을 올랐다 이 길이 맞나 알지도 못하면서

길은 모두 이어졌다 믿었다

잃어봤자 살아가는 일의 하나일 뿐


길을 잃을수록 녹음은 짙어진다


생각하니까 존재하는 거라고 말한 게 누구지?

소크라테스 아니야?

오, 그런 거 같은데


사실은 생각이 아니라 의심이고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데카르트라는 것을 아는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학교에서 배운 공부는 그런 거다 알지만

넘겨야 하는 때도 있는 법 중요한 건 이론이 아닐 때도 있는 법


초록의 초록

초록 다음의 초록


송글 땀이 맺히고 신발은 흙투성이

집에 갈 수 있을까 데카르트적 의심이 들지만

누구도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말이 몸을 입어 짠하고 나타나는 일은 장마철 비만큼

빈번한 것 풀무덤 모기만큼 떼 지은 것


의심도 진심이라 믿던 마음들


너 생각해 본 적 있니

무릅쓰다는 말의 어원이 진짜 무릎을 쓰는 거라는 걸

무릎을 꿇고 무릎을 기고 무릎을 버텨

시간을 견뎌내는 것


넘어진 몸을 털고 벌떡 다시 일어나는 것


새하얀 종아리들이 새카맣게 되도록

길을 걸어도 집은 보이지 않지만

몰래 나온 학교마저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은 걸었다


조팝나무 은행나무 회화나무 신갈나무 벚나무 동백나무 배롱나무

온갖 나무들이 가로수로 쓰이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무릎을 쓰는 일이 단지 무릎의 일만은 아닌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초록 다음 무수한 색이 하나 둘 터져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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