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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Jul 31. 2020

누구든지 최악의 모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때때로 ‘나의 최악을 기억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싶은 날이 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나조차도 내 마음이 제어가 안 될 때가 있다.

지겹도록 오랫동안 무겁게 내리누르는 마음의 병 때문이던지, 아니면 일시적인 마음의 상처 때문이던지.

아니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전혀 변하지 않는 나의 환경 때문이던지.


이유야 어찌 됐건, 그런 날이 있다.


분명히 나도 나의 잘못된 부분을 자각하고 바꾸고 싶지만, 누군가가 나올 수 없는 감옥에 나를 가둔 듯,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날이 있다.

저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재밌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이끌어 가던 저 사람처럼 나도 언젠가는 그런 빛나는 날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를 비추는 조명이 몽땅 꺼져버렸고, 내 주변은 깜깜하기만 해서 심연으로 가라앉은 나의 마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갈 뿐.


나를 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상대방을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그러면 홀로 씨름하던 나를 상대방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뜬다.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원래 나도 이렇지 않았어요!’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부질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힘 빠진 모습으로 나는 고독을 즐기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 최악의 나날들이 지나가고 짙은 회색 구름이 걷히면 쨍쨍한 햇볕이 나오듯, 그렇게 나는 최악의 나날을 견뎌내고 또 순탄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제야 주변을 챙길 여유를 가지며, 실없이 웃을 수 있었다.


언젠가 최악의 날을 겪던,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겨내기 위해 힘쓰던 나와 닮은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의 표정은 울적했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마치 이마에 ‘이건 진짜 내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써붙이고 있는 것 같지만, 주변 사람들을 떠나가게 만드는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던.


그의 축 처진 어깨가 부정적인 기운을 뿜고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고독해 보였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걸 힘이 없어 구석진 곳에 홀로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무슨 오지랖이었던 건지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는 서툴고 불안정해 보였지만, 나와의 대화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닥쳤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이 사람의 인생에는 최악의 나날과 최고의 나날이 공존한다는 것을.

이 단편적인 면만으로 판단받을 수 없는, 그런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전에 나는 섣불리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을 좋아했다.

현재 타인의 모습을 보고서 그 모습이 전부 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그 안에 사람은 변하기도 하더라.

내가 짧은 몇 년 사이 최악의 모습과 최고의 모습을 보았듯이.


누군가는 최악의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다.

지독하고 어두운 나날에 나도 어쩔 수 없던 나를 떠올려보면, 분명 벌거벗겨진 사람처럼 초라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분명 나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벼랑 끝에 몰려 절박함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나오던, 이성이란 없던 본능적인 모습일 뿐이었다.


짙은 어둠 속 튀어나왔던 모습만이 내 진짜 모습이라 믿으며 절망하고 그 모습에 얽매여 앞으로의 생을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삶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분명 최악으로 어두운 그림자도 있고 최고로 밝은 따스한 모습도 있기에.


언젠가 내가 속으로 ‘이 모습을 내 전부라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간절히 울부짖었듯이 분명 이 세상 누군가도 그러하지 않을까.

오늘의 나는 최고의 날을 살고 있지만, 내일의 나는 최악의 날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될 것이다.


그러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지금 최악의 날을 견뎌내고 있다 해서, 이것이 그의 전부라 생각하지는 말자.

그를 향한 무조건적인 포용을 하기에는 나도 벅찰 수 있기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모습이 그의 전부라고만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말자.

언젠가 내가 깊은 어두움 속에 살 때에 밝은 빛 속에 사는 그를 바라보는 날이 찾아 올 수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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