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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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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냥 Oct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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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이상으로 재판을 마칩니다. 무죄 판결이 났다. 고작 판사의 한마디로 끝나는 반년간의 재판. 허무하다. 난 그간 무엇을 한걸까. 없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을 들였다. 겨우 이 한마디를 들을려고. 후련한걸까, 아니, 한국 사회가 직은 바람에도 날아가버리는 연약한 울타리라는걸 알아버린 허무함일까. 고작 앙심을 품은 한 사람이 어설피 조작한 자작극에도 휘둘리는 조약한 법체계를 가진 나라. 공원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천진한 강아지들은 공원을 제집마냥 거칠게 뛰어논다. 반려인들은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본다. 평범한 일상. 평화로운 모습. 이질감이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도 허락되지 않는 영역. 자의식 과잉일까? 상념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새 석촌호수에 다다른다. 놀이동산의 찬란한 불빛이 호수 표면에 부딪혀 별빛마냥 아른거린다. 환호성이 들린다. 안전함이 따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안전한 위협에 카타르시스를 누린다. 한참을 최면에 걸린듯 눈과 귀를 떼지 못한다. 역시 나에겐 허락되지 않는 영역. 흐음. 숨을 깊이 들이쉰다. 떠나자! 마음이 외친다. 떠나자! 배를 타던 그때 엄마가 가졌을 마음과 비슷할까? 지안아! 호수 맞은편에서 수진이 뛰어온다.


그거 알아? 내 꿈은 내내 파리지앵이 되는 거였어. 음, 영화 ‘새 구두를 사야해’의 여주인공 같이 여운이 남는 삶을 살고 싶었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한 발 쯤은 작은 희망에 마음을 담근채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설명이 잘 안되는것 같다. 응 맞아. 너 뭔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 영화도 처음 들어보고. 하지만 뭐 어쨌건 빠뤼에 살고 싶으시다, 라 쎄느를 보면서 와인나발도 불고 싶다, 이런거지? 하하하하! 야! 깜짝이야. 너 조용한 애가 가끔 발작같이 크게 웃으면 엄청 무서운거 알지? 아, 미안. 하하. 읏겨서 눈물 나오겠다. 흠흠. 맞아. 니 말이 맞네. 난 그저 세느강을 보고 싶은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여름 열기가 다 빠지지 않아 벤치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해 반갑게 느껴진다. 그래서, 얼마나 있다 올 계획이야? 이번엔 계획 안세우려고. 오, 왠일이야 계획쟁이가? 그럼 막 한달 있다가 올 수도 있나? 작은 바람이 말 끝에 실린다. 하하, 그럴수도 있고, 영영 안 올 수도… 말 끝을 흐리는 것은 아쉬움이 생겼다는 것이겠지. 이곳, 한반도 남쪽에 미련같은건 먼지만큼도 남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아니게 되었나보다. 수진의 존재만으로 0의 의미가 어느새 1이 된 것이다. 지안아, 그래도 말야, 니가 생각나면 아니… 보고싶어지면. 수진의 눈동자에 작은 눈물이 맺힌다. 보고싶어지면 내가 파리로 찾아가도 될까? 그럼 나도 세느강 구경시켜줄래? 이제 알고 있다. 지안도, 수진도, 평범한 시간이 이어졌다면 둘의 미래는 조금 달랐겠지. 응. 그럼. 더 말을 이으려다 줄인다. 어쩐지 더 많은 얘기를 나누면 떠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연락할게. 조금전과 같이 웃진 못하겠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분다. 이 여름도, 사건들도 바람과 함께 흩어지겠지. 인생은 원래 다 그런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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