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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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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냥 Oct 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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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육지에서 왔다며? 어디 한번 육지말 써봐. 구경좀 하자. 어김없이 반복되는 아침인사. 여섯명의 아이들이 내 책상을 중심으로 빙 둘러 서있다. 육지말 같은건 없어. 그냥 너네랑 똑같은 한국말이야. 지치지도 않는것인가? 처음엔 왠지 무서운 기분이 들어 뭘 해야 육지말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난 육지말이 뭔지 잘 몰라. 그냥 썼을 뿐이야. 와하하하. 야 그게 육지말이야. 더 해봐 더. 고통이 반복되면 무던해 진다고 하던가? 이젠 별 감정동요 없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정도가 됐다. 아니, 실은 괜찮지 않아. 어떤때는 속을 벌벌 떨고, 또 어떤때는 열불이 차올라 날 둘러싼 이놈들을 하나씩 붙잡고 눈알이 터질때까지 때리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괜찮은척, 엄마와의 생활로 인해 이미 괜찮은 척 연기 하는 것은 탁월하다. 새삼스러울 것 없어. 내가 고요하면 주변도 고요해지겠지. 야야 재미없다. 가자. 우르르 자리를 떠나는 여섯 무리들. 하아… 오늘의 가장 피곤한 일과가 아침에 끝나서 다행이다.


특별히 다를것 없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이사온 곳에서의 학교 생활은 거칠거칠하다. 내가 이물감이 드는 사람인걸까, 원래 이곳에 속해있지 않았으니 그들이 반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어쩔 수 없이 이전 생활과 비교를 하게 된다. 툭. 툭. 속마음을 얘기할 사람이 없으니 하교길 눈에 치이는 돌맹이들이나 발로 차며 답답함을 털어내 본다. 툭. 툭. 저벅저벅저벅. 툭. 툭. 저벅저벅. 툭. 저벅저벅저벅저벅. 발 뒷꿈치로 보이는 그림자가 어느새 길쭉해져 있다. 앗차. 또 지나쳤네. 마음이 가벼워질 때까지 땅만 보며 한없이 걷는게 습관이 되다보니 집을 지나 한참을 와서야 알아차리곤 한다. 평소보다 더 많이 지나와버린 오늘. 길 가에 보이는 정미소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본다. 혼이 빠져나간 듯 일렁이는 흐릿한 사람이 보인다. 나인가? 유령인듯 해 보이기까지 해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얼른 눈을 돌리고 뒤돌아선다. 콧 내음에 비릿함이 섞이는걸 보니 바닷가까지 내려와버렸나 보다. 집에 가 봐야 아직 엄마는 돌아와있지 않을테니 이왕 여기까지 온거 바닷가를 나가보기로 한다.


쏴아. 쌔애앵. 쌔앵. 쏴아쏴아. … 해는 이미 저물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진 후 피를 닦지 않아 굳어버린 검은 피 딱지 같은 색을 띈 노을이 바다 끝 길게 깔려있다. 쏴아아아아. 쏴아아. 이사온지 벌써 3년, 이방인을 벗어나지 못한 이곳의 나. 쏴아 쏴아 쏴아아. 사실 이사오기 전에도 딱히 내가 그곳의 공동체 일원이라 생각된 적은 없다. 많아야 둘 정도의 친구와 관계를 맺고 실상 학교에선 그마저도 없어 늘상 혼자였던 터. 이곳처럼 딱히 누군가 이방인이라고 괴롭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리반이라고, 우리 학교라고 느끼게 만들어줄 무언가는 없었다. 그래. 지금도 그와 같을 뿐이다. 솨아솨아. 새애애앵. 바람이 조금 잦아든다. 휴우… 이내 바다 끝이 시꺼매진다. 참았던 숨은 그제서야 폐 깊숙이서 빠져나온다. 별것 아닌 일들에 오늘도 함참 속이 들끓었지. 내일도 그럴까? 모래도 마찬가지일거야. 별은 언제 보일까? 딴청을 피워봐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아. 보지 않는다고 마음이 평화로워질 수 없다. 엄마는 내게 보이지 않는 교육을 해주고 있다. 어두워지는 하늘과 바다는 마치 엄마의 요즘 표정과 같달까. 사가악. 사각. 사각. 서거걱. 서걱. 서걱. 바닷가엔 내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다. 해변 모래는 걷기가 힘들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지 않으면 비틀거리기 일쑤. 큰 조개껍질을 밟으면 자칫 다칠수도 있다. 위험하다고 손을 잡아줄 사람은 없다. 서걱. 서걱. 서거걱. 온전히 내가 견뎌내야 할 걸음임을 깨닫는다.


어둠이 가득 드리운 돌담길을 한시간쯤 걸었을까? 파란 지붕의 자그마한 집에 알전구가 발하는 빛이 보인다. 엄마는 오늘도 마당 평상에 앉아 있나보다. 끼이익. 저 왔어요. 그래.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간이라 크게 혼날 줄 알았다. 엄마의 시선을 쫒아본다. 검은 하늘 속 별이 제법 담겨있다. 무슨 생각해요? … 나의 말이, 아니 나의 존재가 가닿지 않는 모양이다. 묵묵부답인채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옆에 앉아 같이 하늘을 볼까 하다 이내 집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생각할 것이 많으신가보다. 새로운 곳에서 겪는 어려움은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야 고작 학교나 다녀오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이제 아빠를 대신해 일을 해야 할테니깐. 부자 할아버지를 둔 집은 아니다보니 엄마도 그 삶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내야 할 것이다. 특별한 기술 없는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곳에선 귤 농장 일손 정도이다. 엄마도 힘들 것이다. 그러게 왜 그런 사람을 만나서… 잠시간 아빠 생각이 나려하자 이내 고개를 휘휘 저어 떨쳐낸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야 할 뿐. 부엌 냉장고를 뒤져 김치와 김을 꺼내 식은 밥과 함께 끼니를 떼운다. 엄마를 부를 순 없다. 이런 시간 만이라도 자유롭게 별을 볼 수 있길, 안좋은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길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스스로 밥 챙겨먹기 뿐일지라도.


짹짹 짹짹짹. 유독 새소리가 요란한 아침. 덜커덩. 드르르르륵. 오늘도 이른 시간 일을 나가시나보다. 평소와 다르게 바퀴소리가 요란하다. 이른 아침이지만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기로 한다. 쏴아아아. 물을 틀고 가만히 거울을 본다. 잠이 덜깬듯 원래 그런듯 생기 없는 눈빛. 아직 어린이라 불리는 나이인데 이래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닌들 어찌하겠냐만은… 대충 도시락을 챙기고 교과서 짐을 가방에 넣어 이른 걸음을 옮긴다. 학교까지는 마을길을 30분 정도 걸어 가야한다. 도시에선 상상하지 못한 먼 길이지만 이곳은 높은 건물이 없어 쉬이 먼 곳에 있는 학교가 보인다. 처음엔 가까이 있는줄 알고 느긋하게 출빌했다. 문득 점심 도시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엄미가 오늘은 바쁘신지 깜빡하신 것 같다. 역시 개의치 않는다.. 점심시간은 그냥 시간 떼우는 시간이니깐 등교길 문방구에서 빵 하나 사가면 그만인걸. 내심 작은 서운함이 올라오는 것을 눌러 담으려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며 돌담길을 걷는다.


종종 상상하곤 했다. 아빠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엄마가 하시던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아직 사랑이나 결혼, 어른의 직업 같은 것들은 몸에 닿도록 이해되진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며 그다지 웃는걸 보진 못한 것 같다. 각자 있을땐 각자의 쓸쓸함을 어깨에 지고 있었다. 온종일 집 안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실체가 있는 그림자였지만 그보다 마음속이 어둡다는 느낌에 가까운. 몸을 일으키려,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바닥을 적시고 있는 검고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온통 등에, 다리에 달라붙어 있어 어느곳 하나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 느낌. 없애고 싶은 감각인데 먼 곳으로 이사를 온 지금까지도 여전히 느끼고 있다. 엄마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을까?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이곳까지 오게된 게 아닐까. 어쩌면 나와 같이 지금도.


딩동댕동. 온종일 상념에 휩싸여 수업을 듣는둥 마는둥 하고 곧장 집으로 향한다. 온종일 들었던 생각들에 대해 오늘만큼은 솔직한 마음을 말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길게 이어진 돌담길을 지난다. 푸르게 맑은 하늘. 휩싸였던 어두운 감정들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이다.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왠지 오늘 얘기를 하고 나면 우린, 엄마와 나는 진짜 이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먼곳으로 몸만 온게 아니라 마음 편히 이곳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 처럼, 전에 있던 사람은 딴사람이었던 것 처럼,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답지 않은 밝은 생각을 하며 집에 도착한다. 끼익. 현관문이 조금 열려있다. 엄마? 한시간쯤 뒤에 돌아오실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와계시나 보다. 문을 열자 집안은 아직 깜깜하다. 불을 켜고 거실을 바라본다. 빨간 편지지. 한 눈에 들어오는 이질의 물체를 빤히 바라보며 서있다. 뭐지? 사실 알것만 같다. 아니, 확신이 든다. 내내 가져왔던 불안감의 실체를 마주한 듯 하다. 어쩐지 덤덤한 기분이다. 엄마 멀리 일이 생겼어. 다녀올테니깐 밥 잘 챙겨먹고 있어. 새하안 편지지에 새겨진 내용은 어쩜 그리 아빠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해준 것과 똑같은지. 놀랍지 않다. 편지를 접어 넣고 책장 한켠에 둔다. 목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보리차를 들이킨다. 내장을 따라 흐르는 찬기운이 느껴진다. 어쩐지 가슴 한 가운데기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공허하다. 배가 심하게 고플 때 느껴지는 것과 유사하지만 그것보다 좀 더 강한 허기짐의 공간이 느껴진다. 똑. 믈방울 하나가 입 속으로 떨어지고 더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유리병만 남는다. 배가 물로 가득차 배가 부르다. 여전히 가슴에 빈 공동이 느껴진다. 과학시간에 배운 블랙홀이 안에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된다. 모든 기운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아, 어쩌면 이 공간은 영원히 채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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