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 이렇게 하고오면 더 의심받아. 지금 이 건물안에 너밖에 안보여. 가급적 평범한 여대생처럼 보이려고 요즘 핫하다는 쇼핑몰에 베스트 상품들을 모아서 입었는데, 좀 과하나? 아주 아이돌 납셨네. 너 그 썬글라스만 좀 벗어주면 안되겠니? 어치피 너가 판사인줄 아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어. 면박주는 시은을 무시하고 그대로 앞을 응시한다. 아냐. cctv 천국 한국에서는 이정도는 가려줘야지 신분을 숨길 수 있는 법이라고. 완벽한 계획은 세워뒀다. 점심시간 사람들이 붐비는 혼잡을 틈타 직원 뒤에 바짝 붙어 저 보안 검색대를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조사한 점심시간 끝이 5분 남았다. 끝 시간에 몰리는 인파를 이용하자. 저기요. 검은 양복에 스포츠 머리의 건장한 2명이 다기온다. 저기요. 말 들리시죠? 네..네? 못들은척 해보려 하지만 어설픈 연기력이 발목을 잡는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여기 직원분 아니시죠? 끙… 들어가는 방법만 생각했지 경비원을 대응할 생각은 하지 못한 어설픔이란. 문방구에서 사탕을 훔쳐먹다 들킨 어린아이들처럼 경비원에게 눈을 맞추지는 못하고 서로 어버버버 하고 있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네, 네네.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잠시만 전산시스템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출입증 주세요. 네, 여기있습니다. 뚜벅 뚜벅 뚜벅 걸음 소리가 발 앞에서 멈춘다. 여기서 뭐해 수진아? 응? 아.. 그게.. 이지안님! 잠시 데스크로 와주시겠습니까? 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줄래? 으응. 지안이 경비원들이 돌아간 데스크로 멀어진다. 수진아, 나 이제 가도 되는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다닥 뛰어간 시은이 벌써 출구 앞에 서있다. 얘가 원래 이렇게 빠른 애였나? 피스! 입을 뻐끔대며 손가락 브이를 만들어 날리고는 시은이 이내 사라진다. 하아. 내가 얘한테 뭘 바랬냐. 지안이 이내 돌아온다. 지금은 못들어간대.
그래서 뭐야? 니가 직접 증거를 찾으러 왔다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줄 알아? 응. 응? 그게 끝이야? 상대방한테 유리한 고지를 여깄습니다 하고 냅다 바치는 꼴이라고 지금 너가 하려는 일이. 잘못하다 너 감옥가. 평생 범죄자 낙인이 찍힐수도 있다고. 넌 가족도 없냐? 응. 응? 응. 응? 응. 진..진짜야? 나 엿먹으라고 대충 대답하는거 아니지? 응 아냐. 오년쯤 전에 엄마 돌아가시고 아빠는 국민학교때 나 전학갈 무렵 이후론 소식이 없어. … 괜찮아. 하… 미안. 이게 무슨 경우없는 질문이었는지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진짜 미안하다. 그, 알지? 우리 전혀 친하지 않았잖아, 말도 나눠보지 않고. 난 전혀 몰랐어. 원래 없진 않았으니깐. 많이들 그렇듯 우리집도 비슷한 어른들의 사건을 겪었을 뿐이야. … 할말이 없다. 얘랑은 왠지 답답하게 맞지 아는 구석이 있다. 아구가 어긋난 두개의 톱니처럼 돌릴때 마다 탁탁 튄다. 풀리지 않는 대화와 대조적으로 좋은 날씨다. 햇살이 법원 휴게실 바닥 깊숙이 드리운다. 오래된 법원 바닥은 마치 초등학교 교실 나무바닥을 연상되게 한다. 그시절 친구와 한 자리에 있으니 어쩐지 냄새조차 그날의 교식 바닥으로 느껴진다. 침잠하는 공기. 이어지는 침묵. 어쩐지 지안이 미워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실은 당황하고 있는 거면서, 또 얼굴이 시뻘개져 있을 거면서. 넌 뭐가 그리 당당해? 허락받지 않은 채 말이 흘러나온다. 당당한게 아냐. 그냥… 뭘 그리 혼자 다 할 수 있을것처럼 말하는데? 나도 알아 근데… 너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야. 난 얼마든지 널 도울 수 있어. 도와주지 않아도 돼. 툭. 넌 그러면 안되는 위치에 있잖아. 그렇지 않아! 단발마와 같은 비명이 터지고야 만다. … 크게 반박도 하지 않는 지안. 답답하다. 왜 이 아이는 20년도 더 훌쩍 지나고서도 그때처럼 곧을까. 어떻게 이렇게 의연할까: 너의 꿈을 이룬건 나인데 왜 여전히 난 널 시샘하고 있는걸까. 왜 난 너처럼 되지 못하는 걸까. 넘쳐나는 말이 한가득 마음을 넘어 목구멍에, 입안 가득 차올랐지만 이내 참아낸다. 미안. 소리 질러서 미안. 아니야. 여전히 같은 태도. 넌 내가 밉지 않니? 그럴리가 있어? 이렇게 내 얘기도 들어주러 온거잖아. 그저 고마울 뿐이야. 어려운 일이란거 잘 아는데 뭘. 고개를 숙인 지안의 옆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안아. 응? 우리 서로 보면서 얘기하자. 응. 눈동자를 마주한다. 슬픔을 넘어 회한이 느껴진다. 나, 정말 니 일 돕고싶어. 그렇게 하게 해줘. 내가 어찌되든 아무 상관 없어. 이깟 판사직? 안하면돼. 요즘 AI가 나와서 어차피 우리도 정년 못채우고 다 대체된대. 이런 직업 계속 가지고 있는거? 아무 의미 없어. 내게 중요한건 ㄴ…! 입밖으로 내밷어지지 않는다. 이제서야 깨닿는다. 시샘이 아냐. 중요한건 지안이 그 자체. 내 뒤에 꿈을 발표한 그날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 늘 혼자만의 공간에 갇혀있던 지안을 바라봐오던 어릴적 시간들. 중요한건 너가 찾으려는 그 증거야. 간신히 말을 비틀어 낸다. 내가 법과 진실을 사랑해서 판사가 된건데 겨우 공무원 밥통 지키자고 아무것도 안하는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래. 지금 중요한건 지안이의 억울함을 풀어주는거야. 이런 감정은 다음에 확인해도 돼. 같이해. 단호한 눈빛을 지안에게 보낸다. 왜 난 이렇게까지 이 사건에 집착하고 있을까? 아니, 지안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머릿속이 혼란스럽지만 눈빛은 거두지 않는다. … … … …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봐. 침묵을 견디지 못한 수진이 말을 잇는다. 지안의 입가에 알듯 말듯한 작은 미소가 남는다. 알겠어, 고마워. 수진아. 이렇게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는데. 뜻밖의 대답이다. 으…응 아냐 뭘. 얼굴이 붉어진것 같다. 화를 내서 그런 것일거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가 어색해 벌떡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한다. 배고파! 밥이나 먹자! 너때문에 점심도 못먹었단 말이야! 힐끔 뒤를 돌아보며 지안의 눈치를 살핀다. 선지국 먹을 줄 알아? 피식 웃는 지안.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