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이곳은 서울과 위도가 거의 비슷하다. 비슷한 시기에 오는 비슷한 더위. 하지만 짙어지는 햇살 속 눈에 담기는 풍경은 확연히 다르다. 고층 아파트, 빌딩이 없어 넓게 펼쳐진채 한눈에 담기는 스카이 라인. 초록이 반짝이는 샹젤리제 거리. 그 끝으로 보이는 거대한 독립문. 윤슬이 파랗게 반짝이는 세느강. 강변을 겉다보면 이내 나타나는 웅장한 에펠탑. 이 모든 픙경 속 자유로이 도시를 즐기는 파리지앵, 파리지엔느들. 이곳에 온지 2년도 더 넘었지만 여전히 매일이 새롭고 늘 반짝인다. 그래서인지 처음 1년여는 에코백 하나 걸치고 나선 산책길에 관광객의 경쾌한 발걸음이 담겨 어울리지 않는 현지이방인의 모습이 펼쳐졌다. 어쩐지 오늘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뎓던 그날과 같은 설램이 발 끝에 담긴다. 하나 둘 셋, 둘 둘 셋, 하나 둘 하나 둘, 잘 알지도 못하는 왈츠 스텝을 소심하게 따라 해본다.
고교시절 글로만 접했던 이곳. 홍세화 작가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또 경향신문에 실리던 사설 ‘목수정의 파리통신’. 똘레랑스의 나라. 다름과 틀림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 개인의 욕망을 존중하는 문화.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품은 곳. 저항, 또 저항. 한국의 기성문화, 가부장제와 군대식 학교문화, 몰상식의 상식화, 만연한 가스라이팅, 결국 폭행당하는 학생 중 1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한국땅에서 벗어나 드디어 20년만에 파리를 걷고있는 스스로를 인지하는 것 만으로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크나큰 뿌듯함을 느낀다. 이번 생에는 결국 못올거라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커다란 사건을 겪었지만 조용히 뿌리부터 썩어가고 있던 날 뽑아내어 준 그 사건이. 그리고 수진이. 응? 2년간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린다. ‘카톡!’ 누구지? 한국에서 맺은 모든 인연과 연락을 끊은지 오래되어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된다. 어?
샤를 드골 공항. 365일 인파로 북적이는 이곳, 뜻밖의 손님은 엄지 손가락만큼의 크기만 보여도 알아볼 만큼 나에게 존재감 가득하다. 수진이 저기 서있다. 나 왔어. 그녀 역시 날 발견한 듯 팔을 힘차게 흔든다. 뚜벅 뚜벅 뚜벅뚜벅뚜벅. 나도 모르는새 걸음이 빨라진다. 야! 선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밝게 웃는 얼굴이 선명히 보인다. 어느새 한 걸음 앞 그녀를 마주한다. 공항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수진을 바라본다. 다행이다. 연락 받아서. 너 여기 없으면 어쩌나 했거든.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 유독 밝은 햇살이 비치는 날. 서서히 둘의 발 아래로 빛이 드리운다.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햇빛 때문일까? 아니면… 나 세느강 구경시켜줄래? 불필요한 생각이다. 응. 가자. 어제 봤던 사람마냥 긴 얘기를 나누진 않는다. 공항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 그래. 파리에선 지금 느끼는 이 선명한 감정에 충실하자. 내민 왼쪽 손에 망설임없이 오른 손이 포개어진다. 좋네, 파리. 응. 앞으로 더 좋아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