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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삽니다.

4월 설산의 한라산 오르기

by 김유진

지난달부터 갈까 말까 고민하던 한라산 등반을 위해 제주에 다녀왔다. 한마디로 고생을 산 것이다. 여행을 갈 때 휴양보다 고생길을 더 선호하는 편이라(오죽하면 가고 싶은 해외 여행지 1순위가 페루의 마추픽추이다.) 한라산 등반 외에 많은 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한라산은 2019년 11월 이후로 6년 만에 등반했는데 2019년에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가 아직 운영 중이어서 똑같은 곳으로 첫날 숙소를 잡았다. 등산화와 가방은 집에서 챙겨가고 등산스틱만 대여하려고 하는데 다른 게스트들이 바람막이, 패딩, 심지어 아이젠까지 대여해서 4월에 아이젠을 써야 하나 싶어 어떤 여자분께 여쭤봤다.


"아이젠을 껴야 할 정도예요?"

"눈이 내렸대요."


우리의 대화를 들은 어떤 남자분이,


"아이젠 가져가야 돼요."

"그러니까.. 아이젠을 낄 만큼 눈이 쌓인 거예요?"

"(진지하고 단호한 얼굴로)네."


4월 중순에 한라산에 눈이 쌓이나 싶어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여쭤보니 사장님도 9년 만에 이런 날씨라나 뭐라나... 쓸데없이 돈을 쓰는 건 아닌가 싶어 잠깐 고민했지만 챙겨가는 게 아무래도 낫겠다 싶어 바람막이에 등산스틱, 아이젠까지 대여하고 다음 날 한라산을 향했다.




새벽 6시 20분. 성판악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등산화를 갈아 신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와. 바람막이 대여하길 백 번 천 번 잘했다.'생각하면서. 2019년에는 친구와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서 성판악 코스로 내려왔는데 그때 관음사 코스가 상당히 아찔했던(너무 아름다운데, 너무 힘들었다.)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성판악을 오르고 내려오는 코스로 결정하고 입산했다.





-2019년 11월 한라산-



성판악 코스 초입과 중간은 약간 올레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있고 경사가 완만해서 오르기 아주 좋았다. 부분 부분 눈이 살짝 쌓여 있고 콧등이 시원해지는 숲길이 너무 좋아서 나는 초입부터 마음이 행복했다. 지리산은(천왕봉을 올랐을 때) 날카롭고 공격적인 느낌이고 한라산은 푸근하고 풍성한 느낌이다. 나는 푸근하고 풍성한 한라산을 더 선호한다.



-한라산 초입과 중반-


초반에는 살짝만 쌓여 있던 눈이 중반으로 향하자 굵게 쌓이고 얼어 있었다. 꽤 미끄러운 곳도 많고 이번에는 일행 없이 혼자였기 때문에 조심히 올라갔다.(게다가 중반 지점부터는 앞뒤로 사람이 없어서 특히 더 조심히.) 중반 이후부터 조각처럼 나무에 붙어있는 눈얼음이 보였다. 거센 바람 때문인지 독특한 모양을 갖추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손이 차갑게 얼어 가는 걸 느끼지 못할 만큼 감탄하며 설산의 한라산을 마음껏 누렸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정상구간으로 오르기 전, 입산할 때 앞에서 오르던 남자분을 보고 저분을 따라 올라가자 생각했는데 그전까지 쌓였던 눈과는 다른 스케일 때문에 뒤처지면서 다시 홀로 산을 올랐다. 눈에 발이 푹푹 담겨 발가락이 축축해졌다. 그래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설산 등산은 처음이라 걱정이 되어 운이 없나 싶었는데 오히려 좋았다. 설산의 한라산을 만나다니! 황홀하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몸이 흔들릴 정도의 거친 바람을 맞고 딱딱하게 얼어버린 눈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온통 하얀 설경에 눈이 부셨다. 백록담은 얼어 있었고 바람은 어서 내려가라는 듯 매섭게 불었다. 처음 보는 분께 사진 좀 찍어주세요 부탁해서 사진을 얼른 찍고 맑은 날씨 덕분에 깨끗하게 보이는 제주의 풍경과 바다를 눈에 양껏 담고 서둘러 내려와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김밥과 미온수가 되어버린 물로 컵라면을 먹었다. 면이 풀어지지 않고 딱딱했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정상을 다녀온 게 너무 뿌듯해서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게 다 맛있었다.







한라산을 오르기 전 일요일에 하동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를 참여했다. 10km 코스, 기록 1시간 1분 27초. 사실 마라톤도 고생을 사는 격이다. 참가비 3만 원을 지불하고 몸을 고생시키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작년보다 단축된 기록을 보면서, 그렇게 뛸 수 있는 체력이 된 것을 느끼며 고생을 산 것이 자랑스러웠다. 비행기 값이며, 차 렌트비용이며, 등산장비 대여비며 이런저런 것에 비용을 지불한 이번 한라산 등반도 그렇다. 고생을 돈 주고 샀어도 내게는 너무나 큰 가치로 여겨진다. 몇 년 후에 또 올라야지. 그땐 푸른 백록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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