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를 배워 부모님 품에서 벗어나 혼자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독립을 향한 여정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글씨를 배워 내가 정보를 수집하고 내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을 땐, 나는 이미 너무도 자기 생각이 뚜렷한 어린이였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 생각과 사회적 규범이 종종 충돌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규범을 받아들였다. 모범생으로서 모나지 않게 따랐던 것이지 내면화하는 속도는 더딘 편이었던 것 같다. 많은 규범 앞에서, 이건 아니지. 내가 크면 이렇게 하지 않을 거야. 난 더 좋은 방법을 알아.라고 생각했었다.
사장의 직원에 대한 갑질이 잘못된 관습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직원도 내게 안 하는 극존칭을 쓰며 업무 지시와 “오셨어요.”, “저 갈게요.”를 제외하곤 거의 말을 건네지 않고 사라지는 사장이 되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을 심화반으로 편성하여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고, 우리 학원은 학생을 레벨 테스트로 걸러 받거나 공부 잘하는 아이와 학부모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다 당연한 듯이, 씩씩하게 이겨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정말 이겨내기가 수월하지가 않다. 바로 “결혼을 함으로써 네가 정상임을 증명하라”는 압박이다. 오늘도 유부녀인 친구에게 “괜찮은 애들은 금방금방 결혼하고 없어지더라”라는 말을 듣고 왔다. 아직 없어지지 않은 나는? 내가 사지육신, 정신에 금전 상태까지 멀쩡하다는 것을 결혼하지 않고 어떻게 증명해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결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어딘가 큰 하자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곁눈질을 못 본 척하며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한 독립을 하기 위해 독립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고, 그 자료 조사를 하는 도중에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제적 독립, 혼자 살기, 퇴사 후 프리랜서 생활 등을 독립으로 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상은 “꽤 버는 기혼의 직장인”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지금 내가 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한 상태인데, 나는 종종 결혼 못 한 반백수 취급을 받는다.
그런 취급을 받을 때마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조바심이 나서 스스로를 검열한다. 모범생 부부의 모범생 장녀는 굳건한 사회적 관습을 이겨내는 게 두렵다. 나이 들어서 외로워지면 후회할 거야, 라는 말은 힘이 세다. 아직 나이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 안 늙어봐서 실수하고 있는 건가? 나이 든 사람들 말을 들을까? 사막 여행을 준비하면서 미리 다녀온 사람들이 사막에 갈 땐 물을 많이 챙겨가라는 조언을 해주는 데 그걸 안 듣고 뻗대는 기분이다.
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내가 남의 자율성을 침해하거나 내 자율성을 빼앗겨 버릴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내 집 거실은 서재로 꾸며져 있다. 내가 사는 공간엔 거실에 TV가 놓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TV가 내는 소음을 싫어한다. 만약 남편이 새벽에 TV로 스포츠 경기라도 본다면? 남편과 TV를 묶어 자유낙하시켜버릴지도 모른다. 쉬는 주말에 시가 행사에 끌려가거나 종교 강요라도 받는다면? 나는 나의 독립성을 이만 단념하고 가정의 유지에만 집중할지 나의 인권을 지킬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균형 있게 쓰고 싶어 결혼한 지인들에게 자신이 독립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여부를 물었다. 한 남자인 친구의 대답이 인상 깊었다. 결혼은 서로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독립성 유지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가정 유지를 위해 서로의 인권을 포기하는 게 결혼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겁이 많고, 기혼자들은 용감무쌍한 게 아닐까? 그들은 내게 혼자 살 생각을 하다니 씩씩하다고 하지만 인권을 접어 둘 용기를 낸 그쪽이 더 씩씩한 것 같은데.
나는 결혼이 독립의 반대어가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고 해서 독립성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립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립은 내 자리에서 내 고유의 것을 지켜가며 꿋꿋하게 사는 것이다. 내가 내 일을 어떤 자세로 할 것인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느낀 메시지를 어떻게 삶에 녹여낼 것인지, 사소한 잘못을 한 상대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등의 모든 의사결정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오늘 나는 코비드 상황 하에서 길을 잃은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를 연구하며 나 자신의 고유성을 느꼈다. 결혼은 나의 독립성이 내리는 수많은 의사결정 중 하나일 뿐이다. 나의 독립성은 아무에게도 화내지 않고도 거실을 고요한 장소로 유지할 것을, 주말엔 쉴 것을, 무종교인으로 살 것을,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그들과 교감함으로써 달랠 것을 내게 조언한다. 이로써 됐다. 결혼해도 외로울 수 있다느니, 우리 세대는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거나 이혼하기 때문에 우리의 노년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외롭지는 않을 거라느니 하는 말을 비혼 진영의 장기말로 쓰지 않겠다. 그것도 모를 일일뿐더러, 또 다른 관습을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내 거실 서재에 책을 한 권 더 꽂는 것으로 내 고유성을 표현하겠다.
나는 남의 자식이 귀해서 종종 우는 사람이다. 이 글을 마친 후 남의 자식들의 삶을 내실 있으면서도 여유를 알고, 따뜻하면서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출근할 것이다. 이런 나에게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나도 기혼자들에게 왜 다들 결혼 따위를 해버려서 나만 이상한 노처녀를 만드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나는 내 자리에서 당신은 당신 자리에서, 고유하게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