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립적인 존재인 걸까, 아니면 그냥 혼자인 걸까

출가와 경제적 자립, 퇴사로는 부족해

by 암사자

현재 나는 혼자 살고 있다. 스무 살 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느라 상경한 이후 쭉 혼자 살았다. 우울증이 극심했을 때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서 부모님 집에 누워있었던 3개월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경제적 자립도 이루었다. 지긋지긋하던 전 직장에서 퇴사하여 내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통념적인 독립 테스트를 통과하긴 할 것 같다.

부모님 집으로부터의 독립은 일단 매우 좋다. 한 번쯤은 꼭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 때 후배가 큰 이유 없이 너무도 독립을 하고 싶은데, 자기가 고시원에서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세 살이 되면 걸음마를 해야 하잖아. 안 하면 이상하잖아. 딱 그만큼 스무 살이 되면 부모 집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안 해보면 몰라. 하지만 한 번 나오면 다시 못 들어가.”

라고 답했다. 그 후배는 얼마 안 가 고시원으로 나왔고, 남들이 보기엔 열악할지도 모르는 좁은 고시원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자기 효용감을 느꼈다고 한다. 의자에 앉아서 내 방에 가만히 있는데 너무너무 행복한 거예요! 행복을 말하는 그 후배의 웃음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독립을 해 본 사람은 모두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내가 하나의 온전한 성인이 된 느낌, 내가 내 살림을 작게나마 꾸리고 있다는 생활에 대한 장악감, 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냉장고를 채워놓고 가스레인지 주위를 닦으며 느끼는 뿌듯함.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동물의 본능과 흡사한 만족감이 귀찮은 집안일을 할 때마저도 느껴진다.

생활 방식에서도 자유가 찾아온다. 1시에 치킨을 시켜먹거나 새벽 4시에 노래를 크게 들어도 된다. 나는 독립 원년에 비가 쏟아지는 여름 새벽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크게 틀어놓고 음악을 들었을 때 완전한 행복을 느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밤새 통화를 할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도 있다. 중학교 때 친구와 밤새 통화를 하는데 아빠가 순찰 차 방에 들어와서 전화기를 숨기고 자는 척을 했다. 그때 아빠가 새벽마다 방에 와 딸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거의 얼굴을 빨아먹듯 하는 무지막지한 뽀뽀를 하고는 뿌듯해하며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마운 부성애이지만 밤새 당당히 친구와 통화할 자유와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조용히 사색에 집중하고 싶을 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학생 때 내가 공부를 하고 있으면 엄마는 문을 열고는 그것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자식들을 키우는 데 자기 인생을 바친 엄마에게는 자식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삶의 큰 낙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엄마의 행복임을 그때도 헤아렸었기 때문에 그 뿌듯함을 박탈할 수 없어 참았지만, 사실 나는 그 순간부터 집중력이 깨져 놀기 시작했다. 상황극도 하고 내적댄스도 추고 소설 쓰다 울기도 하는 등 앉아서 놀았다. 점잖은 집의 첫째에겐 반항의 유전자가 없다. 차마 그 의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엄마에게 그렇게 보면 감시당하는 것 같고 집중력도 깨지니 문 열지 말라 말할 용기도 없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혼자 글을 쓰고 있을 때 아무도 빤히 보고 있거나 “나와서 밥 먹어라”라고 하지 않는 것에 큰 만족을 느낀다. 밥은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걸로 먹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짜 독립했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불면증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밤새 거의 잠들지 못하고 내게 아직도 잠들지 못했느냐고 문자메시지로 물어보았다. 며칠 째 수면제 없이는 한숨도 못 잔 나는 이대로 가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해가 뜨자 울었다. 그러자 엄마는 내 집으로 와서 잠옷을 입고 베개를 안은 채 울고 있는 나를 그대로 차에 실어 엄마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부모님 침대에 나를 눕혀 안고 재웠다. 그러자 나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숙면을 했다. 그날부로 내 불면증은 사라졌다. 언제든 잠이 안 오면 엄마가 데리러 올 것이고 그러면 잘 수 있다는 안도감이 불면증을 이긴 것이다. 보송보송한 털 잠옷을 입고 애착 베개를 안고 울다가 엄마가 안아 재우니 잠드는 33세 아기라니. 그 한심한 퇴행적 존재가 나다. 그게 나의 민낯이고 내 자존심을 위해 엄마가 덮어 준 나의 독립 현황이다.

그뿐 아니다. 맨날 배달음식에 고기만 구워 먹어서 엄마가 채소 반찬을 해서 나른다. 김치와 참기름, 볶은 깨, 볶은 소금 같은 것도 계속 얻어먹는다. 엄마는 두 집 살림을 다 하는 기분일 것이다. 우리 집 화장실은 참다못한 아빠나 동생이 청소해주었다. 엄마가 내 집을 청소하다 운 적도 있다.

“우리 딸도 병이 나으면 사람처럼 하고 살겠지? 지금 아파서 이러는 거겠지?”

하며 울었다. 우울증 걸리기 전에도 이렇게 살았는데. 그땐 내가 서울에 살 땐 엄마 온다고 하면 그 전날에 청소해놔서 실상을 못 본 것뿐인데. 나야 말로 울고 싶었다.

그리고 새벽마다 야식을 시켜먹어서 비만이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피자에 맥주로, 피자집마다 피자가 달라서 질리지 않고 번갈아 시켜 먹을 수 있다. 꾸준히 먹어서 꾸준히 쪘고 거기에 돈도 많이 썼다. 돈을 살로 바꾸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행위를 내가 했다. 엄마는 비만이 계속되면 당뇨가 찾아와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며 종종 눈은 잘 보이느냐고 묻는다. 내가 정말 누군가의 규제가 필요 없을 만큼 성숙한 존재일까.


경제적 독립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내가 번 돈으로 내 의식주를 해결하고 작게나마 사치도 한다. 나는 쓸모없는 물건을 사고 쓸모없는 행동을 할 때 행복을 느끼므로 종종 큰돈이 스티커를 사거나 펜 잉크를 사는 데 들어간다. 유치원 때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친구들이 내 그림에 경악하여 나를 둘러싸고 수군거릴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모범생인 나를 미술 선생님들만 유독 싫어하셨다. 공부 좀 한다고 미술은 이렇게 성의 없이 해도 돼? 밤늦게까지 수행평가를 열심히 해 온 내게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니요, 저 진짜 늦게까지 열심히 했는데요. 열심히 졸면서 발로 붙였냐? 내내 이런 말을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미술적인 것에 위축되어 있는 동시에 갈증을 느낀다. 그것을 이제야 유서 깊은 잉크 회사가 공들여 만든 잉크 신상품을 매달 사 들이고 전 세계에서 수입된 스티커들을 모으면서 해소하고 있다. 매일 약간의 시간을 들여 가장 좋은 종이에 일기를 쓰고, 꾸밈용 다이어리를 따로 사서 스티커를 아끼지 않고 붙인다. 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 느꼈어야 했을 기쁨을 요즘 느끼는 기분이다.

검도 학원과 헬스장도 다니고 있다. 역시 엉망이지만 내 몸은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 봄가을엔 검도복을 입고 목검을 들고 빵을 사러 간다. 사무라이가 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검도복을 입고 허리를 펴고 걸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그때 용맹하지만 고독한 무사의 표정을 짓는다. 나막신과 비슷한 색의 슬리퍼도 샀다. 그리고 한 달에 책을 30만 원어치 정도 산다. 노트도 샤프도 만년필도 가장 좋은 것을 쓴다. 책을 읽으며 장인이 만든 노트에 질 좋은 필기구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나를 키우는 기분은 단순히 먹고산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지를 결정한 후, 그 모습을 갖춰나가는 과정을 돕는 것이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기본적인 섭생은 물론이고, 가르치고 단련시키는데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내 앞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임을 직원을 고용한 후에 알았다.

하지만 경제적 독립은 막대한 재산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이나 노후준비가 된 채로 여생을 보내는 노인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상황일 것이다. 나도 언제든 위태로워질 수 있다. 코비드 같은 재해가 덮쳐 내가 종사하는 업종이 다 같이 수명을 다해버리면? 내가 아파버리면? 당연히 두렵다. 나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적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집을 사고 노후 준비를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주체 모두에게 무거운 짐일 것이다. 열심히 일한다고 내가 원하는 만큼 모을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어 복권을 산 적도 있다.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내 질문에 남편이 알아서 하겠지 하며 결혼을 꼭 할 것이라는 친구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때마다 나도 이 자유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남편 같은 존재에 기대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보지만, 남편에게도 제 몫의 삶이 버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선택지는 얼른 잊어버린다.

지긋지긋하던 회사도 퇴사하여 내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이것도 일단은 좋다. 출퇴근 시간을 내가 정하므로 최대한 늦게 출근하여 일찍 퇴근한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없는 날엔 잡무를 보조 선생님께 맡기고 출근을 안 하기도 한다. 그리고 고정비용을 제외하고는 내 수입이다. 열심히 일하면 바로 수입이 늘어난다. 상사의 괜한 괴롭힘, 정치질, 시험의 성격이 강한 유도신문 등도 없다. 퇴사를 하고 나서 우울증이 많이 호전되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 내게 퇴사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 입사하고 싶다. 정규직 말고 절대 망하지 않는 학원에 월수금 시간제 강사를 하며 남는 시간에 글을 쓰고 싶다. 코비드 비상상황하에 놓인 소상공인으로 살아보니 덜 벌고 마음 편하고 싶은 날들이 적지 않다. 사장은 고민이 많고 외로운 직책이다. 수입은 들쑥날쑥하고 내가 코비드에 걸리면 바로 망할 수도 있다. 나에 대한 의존도가 거의 100%이기 때문이다. 퇴근을 하고 나서도 업무가 끝나는 느낌이 없다. 나는 학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언제든 전화를 받아야 하고 애들과 대화해야 한다.

그리고 학원에 일이 생길 때마다 나와 직급이 같은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는 사람이 동료와 밥을 먹거나 여행을 떠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데 부럽다. 나의 사업체에는 내가 고용한 직원밖에 없다. 나는 갑질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이라 나의 어떤 행동을 직원들이 피곤하게 느낄지 몰라서 웬만하면 말을 걸지 않는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 때문에 회식도 하지 않는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직원에게 “오셨어요.”와 “저 갈게요.” 밖에 말을 안 한다. 감시하는 것처럼 느낄까 봐 직원 사무실의 투명 유리창을 고개를 저 쪽으로 돌린 채 빠르게 지나친다. 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다. 내가 직원일 때는 원장에게 잘 엉겨 붙었지만 원장이 되고 나니 모든 게 조심스럽다. 처음에는 나이가 비슷해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직원들이 나와 SNS를 공유하거나 시시콜콜한 이유로 통화를 하는 걸 좋아할 리가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모든 프리랜서가 가지는 고민을 나도 다 갖고 있다. 안정성과 자율성은 모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회사 다니면 퇴사하고 싶고, 퇴사하면 입사하고 싶은 건 당연한 것 같다. 그렇게 어제는 내가 사장이어서 좋았고 오늘은 직장이 불안정해서 조바심 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도 출가, 경제적 독립, 퇴사라는 기준은 불완전하다. 내가 나의 독립성을 불완전하게 느껴서 독립에 대한 재정의와 그에 따른 재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싱글인 꽤 버는 프리랜서’인 나는 정말 독립을 한 걸까, 아니면 그냥 혼자인 걸까? ‘꽤 버는 기혼 대기업 직장인’, 또는 ‘꽤 버는 기혼 공무원’이 ‘기본을 제대로 갖춘 삶’이라고 평가받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꽤 버는 것 빼고 다른 것은 내 삶에 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 독립성을 다져가야 할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은 독립적인 인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