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환승 연애를 한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by Enero

그러니까 내가 일단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바람을 피운 적은 없다는 것이다.


합리화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두 여자를 동시에 사귀지는’ 않았다.

연락과 만남의 시작과 끝이 약간 걸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동시에 사귄 건 아니다.

심장의 우심실을 차지하고 있던 여자를 좌심실에 살짝 발 들인 여자가 몽땅 휩쓸어 심장의 안주인을 몰아세운 것뿐이다.


새로 나타난 여자가 만나던 여자 친구보다 조금 더 근사하고 나와 잘 맞았다.

그 새로운 여자가 나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고백한 것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에 더 강렬히 파고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시그널이 맞았다는 가슴을 스치고, 그 여자와 있을 때 이상하리만치 죄책감보다 설렘이 더 커질 때, 나는 만나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나에게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오늘 처음 본 여자’라 답할 수 있겠다.


인정한다. 나는 비겁하다.

그간 그녀를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심이었으므로 한순간에 ‘바람 피운 쓰레기’ 혹은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린 나쁜 놈’이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이제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혹시나 상처가 될까 봐, 아니면 내가 양다리를 걸쳤다고 생각할까 봐, SNS에는 당분간 새로운 연인의 사진이나 데이트 풍경을 올리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 바람을 피웠다거나 양다리를 걸친 게 아니라 생각하지만, 나와 만났던 상대나 사정을 잘 모르는 친구들은 나를 바람둥이나 카사노바로 생각할 수도 있다.


친한 친구들은 나에게 교통카드 마를 새가 없다고, 환승 할인이 끝나기 전에 다른 버스로 옮겨 타는 게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급이라 했다. 지난달 친구들 모임에 데려온 여자 친구가 어느새 이번 달 모임에는 완전히 다른 여자가 되어 나타나니 말이다.

다행히 내 친구들은 눈치가 빨라 실수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저놈들이 취해서 헛소리할까 봐 조마조마하다.


사실 가장 큰 복병은 나 자신이다.

바보같이 이름을 잘못 부른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면 전쟁통도 그런 전쟁통이 따로 없다. 울화 가득한 폭탄을 싣고 폭격기가 내 귀 주변을 빙빙 돈다.

그리고… 이번 연애만큼은 남들처럼 진득하니 오래 만나고 싶은데 앞으로 이 사람보다 더 멋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 지금은 말할 수 있지만, 정말로 또 다른 사람을 맞닥뜨린다면 그땐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자는 이게 애정 결핍이라 한다.

계속 징검다리 건너듯 환승 연애를 하니 첫 연애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석 달 이상을 솔로로 보낸 적이 없다. 끊임없이 연인의 사랑을 갈구하고 연애하는 내 모습이 마치 사람이라면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며 따라가는 시골 강아지 같기도 하다.


결단코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래도 ‘환승 연애’라는 질 낮아 보이는 사랑을 반복하긴 했지만 매번 더 나은 연애를 했다. 수개월의 ‘맞춰 가는 기간’들과 ‘행복했던 순간’, ‘다툼의 이유’를 새로운 사람을 통해 배워가며 상대에 대한 내 개인적 취향이랄지, 만나고 싶은 이상형이랄지 하는 것이 서서히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지난 이별에 후회하지 않는다.

그녀와 사랑하던 그 순간만큼은 후회 없이, 남김없이 다 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사랑이 한 움큼 날아간 연애를 질질 끄는 건 피차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 여자는 나 같은 갈대보다 더 단단한 고목나무를 만나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래서 그녀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며 이별을 고한다.






나쁜 놈의 비겁한 자기 합리화란 걸 안다.


내가 이런 놈인데 결혼해서 한 여자만 사랑하며 사는 게 가능할까 고민도 한다. 정말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나를 평생 매료시킬 인연이 지금 만나는 이 사람일 거라 굳게 믿으며.

오늘도 ‘이 연애가 내 마지막 연애야.’라고 다짐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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