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가 결혼 못 하는 거 아니야?
단언컨대 내가 눈이 높은 편은 아니다.
결혼한 친구들은 “네가 눈이 높아서 결혼을 아직 안 한 거지. 못한 게 아니라.”라고 말하지만, 나는 결단코 눈이 높은 건 아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과락의 기준이 높아지고 다양해졌다는 건 인정한다.
20대 땐 그저 예쁜 여자가 좋았다.
능력이 얼마나 되고 집안이 어떻고 간에, 그냥 그 여자가 예쁘면 좋았다. 예쁘기만 하면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결혼을 꿈꿨을 때 용인 가능한 수준이었으며, 내가 이 여자 하나 못 먹여 살릴까 하는 치기가 있었다.
그래서 예쁜 여자를 만났고, 말 그대로 ‘아가리 청혼’을 해댔다.
20대 중반에 만났던 이상형 그녀에게도 “우리 꼭 결혼하자!”는 뻐꾸기를 날렸다. 나보다 현실적인 타입이었던 그녀는 내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야, 네가 한 달에 천만 원 벌어오면 그때 생각해볼게. 우리 가진 거 하나도 없는데 무슨 결혼?”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멋져 보여서 더욱 그녀에게 빠져들었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 마음에 ‘한 달에 천만 원 벌기’를 목표로 삼고 일에 매진하던 중, 결국 그녀와는 여느 연애와 마찬가지로 시답잖은 이유로 이별했다.
내 사업이 잘 성장해준 덕에 한 달에 천만 원까진 아니더라도 세금을 제하고 월 6-700 정도는 쥘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열심히 해서 그녀에게 다시 찾아가 구애하고 청혼해야지.’라는 상상을 줄곧 해 왔다.
그래서 나를 기다릴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BMW 5시리즈를 끌고 그녀가 살던 집 근처에 가서 커피나 한잔하자고 했다. 차 앞에서 갖은 무게를 다 잡고 서 있는데 그녀가 왔다.
“무슨 일이야? 오랜만이네.”
손을 흔드는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던 길에 네가 사는 동네라 생각나서 연락해봤다는 구차한 말과 함께 테이크아웃 커피를 쥐여주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내 취향을 알고 취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고, 멋진 차도 있다. 그럴싸한 직함이 있어 어디 가서 어깨를 조금은 펼 수도 있다. 아직 내 집 마련은 못 했지만 결혼할 때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재산에 대출을 당겨쓰면 그래도 아파트에서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결혼할 때’라는 게 도대체 나에겐 언제 오려나.
몇 번 연애했고 또 몇 번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관한 기준이 하나둘씩 더해졌다.
일단 당연히 외모가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 자기 커리어를 쌓는 데 욕심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일을 응원해 줄 수 있고, 갑자기 내가 진로를 바꾸거나 사업을 그만둔다 해도 큰 타격이 없을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야무지며 어른에 예의를 갖출 줄 알고, 어느 정도 교양 수준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20대 때에는 기준이 ‘외모’ 하나면 모두 해결되었다면, 30대가 된 지금의 나에게는 상대의 외모, 성격, 성품, 지성, 재력까지 모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평균 이상이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정한 기준에 ‘과락’만 없길 바랄 뿐인데, 그런 여자가 없다.
재고 따지는 게 많아진다.
지금 여자친구는 외모와 성격, 교양 면에서는 만점이지만 자존감이 낮고 생산 활동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렇다고 집안이 빵빵한 것도 아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어 윤택한 삶을 살고 싶은데, 이 친구와 결혼하면 10원짜리 하나도 따지며 아껴 살고, 지금 타는 차도 팔아 경차로 바꿔야 할 것만 같다.
아예 마냥 어리고 예쁜 여자를 잘 꼬드겨 만나보면 어떻겠냐 했다.
우리 나이쯤 되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과락 없는 여자’는 너와 만나 결혼할 이유가 없단다. 그런 여자는 너보다 더 재고 따질 거라고, 네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며 깎아내리는 듯한 말을 가족에게서도 친구에게서도 들었다.
똑같이 30만 원짜리 선물을 줘도 20대 어린 친구는 “우리 오빠가 이런 것도 사줬다!”라며 자랑할 거 아니냐고. 실없는 소리에 코웃음 치며 내가 그 정도 도둑놈 심보를 가진 인간은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아이가 둘 있는 유부남 친구는 나더러 부럽단다.
버는 돈 마음대로 쓰고 남 눈치 볼 필요 없이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냐며. 자기는 와이프 눈치에, 아이들 등쌀에 발바닥이 마를 날 없다 했다.
그래 놓고는 휴대전화 화면에 ‘여왕님’이 뜨자마자 후다닥 전화를 받고 “빨리 들어갈게, 자기야! 사랑해!” 아양을 떤다. 지금 누굴 놀리나?
추석과 설 같은 명절이 싫다.
만나는 여자는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자꾸 묻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누나가 아직 시집을 안 갔다는 점이다. 누나는 최전방에서 엄청난 방어력을 뽐내고 있다.
누나는 친척들에게 “세뱃돈 주시면 그거 모아서 결혼할게요.” 라던지, “축의금으로 서울에 집 한 채 해주시면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서 하나 데려올게요.” 해서 식구들 입을 다 막아 버렸다.
누나는 나더러 뭣 하러 결혼하려 하냐 했다.
성인이 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돈을 벌기 시작하고 온전히 ‘내 인생’을 산 지 고작 10년도 되지 않았다고. 앞으로 50년 정도 더 산다 생각하면 내 멋대로 내 인생 사는 게 그 긴 인생의 10년 남짓밖에 안 되는 게 너무 슬프지 않냐고.
“누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지만, 나는 아내와 아이랑 같이 사는 것도 내 인생이라 생각해.”
짧게 대답하니 “그럼 지금 여자 친구랑 해!” 하는 누나 말에 입을 다물어버리는 내 모습이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