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행복
화장실이 방보다 컸던 구옥에서 보낸 20대
20대에 자취를 할 때엔 특별히 내 취향이 어떤 줄도 잘 몰랐고, 사회 초년생에 돈을 잘 벌 때가 아니라 그냥 잠만 자는 곳에 초점을 맞췄다.
성수동 집에는 에어컨도, 심지어 냉장고도 없었다. 침대도 없는 미니멀리스트 끝판왕이었다.
주로 밖에서 밥을 사 먹거나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워서 별로 필요가 없기도 했고, 냉장고가 있어봤자 음식물 쓰레기만 더 나올 거라 생각했다. 음식물 쓰레기 나오는 게 싫어서 혼자 살면서 배달 음식도 시켜먹지 않았다. 혼자 다 못 먹을 게 뻔해서, '엽떡'이나 치킨은 친구가 놀러 와야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여름에는 이불을 방 한가운데 깔고 양 옆에 선풍기 두 대를 놓고 그야말로 "쌍풍기" 라이프를 즐겼다.
그 와중에 집만 쓸데없이 커서 친구들 열 명은 족히 재울 수 있었다.
방이 세 개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주 작아서 그냥 저렴한 행거를 사다가 옷을 걸어두는 용도로 사용했고, 화장실이 방 한 칸 보다 컸다. 심지어 집 모양도 비뚤어서 가구를 두면 틈이 생겼다.
겨울에는 창이 커서 웃풍이 심하게 들어 집에 놀러 왔던 단짝 B가 내가 없는 사이 창문에 뽁뽁이를 다 붙여 두었고, 여름에는 장마와 함께 물 새는 철이 돌아와 집 여기저기에 바가지를 뒀다.
그런데 그때가 그렇게 좋았다.
그 집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는데, 골목길 안에 길냥이들이 많은 걸 보고 우리 집 마당에 물그릇을 여러 개 두었더니 현관을 열 때마다 길고양이들이 나를 반겨줬다. 보은 하겠답시고 어디서 물어왔는지 모를 양념 치킨이나 새 시체를 가져다 두다가, 골목 안쪽에 생선 가게가 생기고부터는 자꾸 현관 앞에 생선을 훔쳐다 놨다.
치우는 게 너무나 고역이었지만 나를 생각해준 아가들을 생각해서 고맙다고 말하고 몰래 치웠다.
한 번은 마당 철문과 집 현관 사이에 갇힌 적이 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담배 한 대 피우려고 팬티 바람으로 나와서 현관 앞에 쪼그려 앉았는데, 현관문이 잠긴 채로 닫혀버렸다. 철문을 나가면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길이고 나는 오갈 데 없이 거기서 발을 동동 굴렀다.
119에 신고를 해야 하나, 112에 이야길 해야 하나 너무 놀라서 눈물이 다 났다. 이 꼴로 밖을 나갈 수는 없고... 그러다가 내다 버리려고 마당에 두었던 옷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철사 옷걸이를 펼쳐 현관문 틈 사이를 톡톡 치면서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문이 탁 열렸다.
안도감은 잠시, 그때부터가 내 공포의 시작이었다. 이 낡은 집 현관은 너무 쉽게 열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향으로 가득 채운 30대
30대가 된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어딜 봐도 내가 좋아하는 것뿐이다.
벽에는 내가 그린 그림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붙여 두었고, 현관 앞과 복도, 침실, 드레스룸까지 내가 좋아하는 향으로 가득 채웠다. 특히 욕실에 갈 때마다 행복하다. 샴푸와 바디워시부터 칫솔, 치약까지 다 내 취향만 담겨 있다. 샴푸 하나에 8만원 씩이나 하는 게 손이 떨리지만, 매일 쓰는 만큼 이렇게 나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걸 고려하면 가심비가 상당하다.
없던 취미가 생겼다.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 집에 살면서 예쁜 스피커를 하나 사서 좋아하는 노래를 잔뜩 튼다. 낮에는 내가 좋아하는 가요를 듣고, 저녁노을 질 무렵이면 빗방울이 창문을 때릴 때 어울릴 법한 클래식이나 재즈를 틀고 위스키나 와인을 한 잔 마신다. 시끄러운 기계음도 반복적인 비트도 없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밤에 눈 감기 전이나 아침에 눈을 뜨면 그냥 미소가 절로 난다.
20대 때와는 다르게 밥을 해 먹는다.
말이 밥을 해 먹는다지, 좀 더 건강하게 챙겨 먹고 있다. 레토르트나 튀긴 음식은 피하고 현미밥에 카레를 해 먹거나 닭가슴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혼자 먹을 만큼 할 수 있는 요리도 많고, 요즘은 워낙 자취생을 위한 1인 밥상 만들기에 최적화된 제품이 많아 다채로운 음식을 혼자서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집에 온 친구들이 조용한 내 방을 보고 "집이 너 만큼이나 시끄럽다. 누가 봐도 네 방인 걸 알겠다."라고 말했다. 서랍을 열면 보드게임이 있고, 와인 냉장고에 가득한 와인, 그 위에 올려진 싱글몰트 위스키. 벽면에 붙은 온갖 취미들과 테니스 라켓, 그리고 선반을 가득 채운 책과 맨 위에 올려 둔 폴댄스 구두.
심지어 게스트와 추억 기록용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갖춘 우리 집은 그야말로 혼자 사는 데 혼자 사는 것 같지 않은 집이다.
동거인 없이 나 혼자 사는 이 집엔 남편도 내편도 없다.
어제 밤에는 몸이 많이 아파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 택시를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혼자 참았다. 친구나 직장 때문에 속상한 일이 생겨도 집에서 떠들 내 편이 없다. 그래도 전화를 받아주고 웃어주는 내 편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 괜히 나를 괴롭게 할 남의 편도 우리 집엔 없다. 이 고요한 평화가 너무 좋다.
나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최근 여러 사건 때문에 급하게 구한 이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
딱 90일만 더 살아보려다 이 집을 계약하며 딱 1년만 더 살아 봐야지 생각했는데, 아니, 내 앞으로가 딱 이만큼만 행복하다면 앞으로도 잘 살고 싶다.
아직은 약을 먹고 있지만, 내 마음이 지난 30여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동거인이나 반려동물이 없어도, 혹은 없어서 행복하다. 나를 더 채워주는 것도 없지만 그만큼 나를 더 괴롭히는 생각이나 말도 오가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고 사고 싶은 걸 사고, 하고 싶은 걸 한다.
밖에 나가거나 따로 약속을 거의 잡지도 않는다. 코로나 시국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만 보기도 좋고,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내가 집에 초대하고 싶을 만큼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인간관계 스트레스도 많이 줄었다.
어제는 엄마에게 전화해 말했다.
"엄마, 나는 요즘이 살면서 가장 행복해. 내가 왜 이런 걸 다 잃어버리고 살았나 싶어.
그러니까 엄마도 나한테 상기시키지 말아 줘. 나 나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 자꾸 나 걱정하지 마.
아빠한테도 내가 요즘 운동도 하고 성당도 나가고 복직 준비도 하면서 정말 즐거워하고 있으니까, 제발 일산 오라는 말 좀 하지 말라고 해 주고."
엄마는 웃으며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어.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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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내 지인이 있다면 어느 한 부분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딱 한 가지 이야기해줄 수 있는 건, 난 지금 후회도 미련도 없이 행복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