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판악을오르다 2015_10
제주관련 브런치 #10 게시를
몹시 거창하게 기념하는 의미에서
2015년 10월 두번째 한라산 등반이자
첫번째로 백록담을 본 '사건'을 올려볼까 한다.
5년전 가을
처음으로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고 서서
'다시는 한라산에 오르는 일 따윈 하지 않겠어'
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일이 있다.
관음사도 돈내코도 성판악도 아닌
윗세오름까지만 오르면 그만인
'영실 탐방로'를 다녀오고 말이다.
백록담을 보지 못한 것이 마음이 걸렸으나
한라산 등반 코스중
주변 경관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 당시 그게 영실인 줄도 모르고 올라갔었다 )
영실을 다녀왔으니 됐다 싶었다.
그렇게 한라산을 '조망'만 하기를 5년,
정신을 차려보니 일행들의 이끌림에 의해
성판악을 오르고 있었다.
영실을 오르던 그때는
그 흔한 등산복 바지도 아닌
늦여름 관광객 다운 핫팬츠 차림에
등산화도 없긴 했지만 어쨌든
신고 있던 일반적인 운동화로 등반을 마쳤다.
계획된 산행이 결코 아니었다.
앞서 말은 그렇게 웃자고 시작했지만
성판악을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준비하면서
영실등반 후 우연찮게 생긴(?) 등산화를 시작으로
등산복은 아니지만 등산복 비슷한 복장을 체크하고
배낭과 장갑에 양말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하마터면 스틱도 구입할 '뻔'했는데
'뻔'에 그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훗날 후회했다.
성판악 도착 전 편의점에서
뜨끈한 라면으로 속을 채우면서
초컬릿이며 양갱이며 사탕에 소시지 등등
당과 칼로리를 동시에 충족시켜줄 각종 식품군을
구입하는 일도 잊지 않았는데
( 일행들은 정상에서 마실 맥주도 샀다 )
분명 남겨오겠거니 했던 그 많던 간식들이
산행의 2/3 지점에서 증발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역시 만만히 볼 성판악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판악 탐방로 길은 영실의 그것과 확실히 달랐다.
영실에 비해 보는 재미(?)가 덜했다.
즉, 주변 경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성판악이 한라산 탐방로 중에서
가장 긴 코스에 해당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를테면 야구 중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과
하이라이트만 모아 놓고 보는 것의 차이랄까.
생각해보니 영실이 그랬다.
'한라산'의 '하이라이트'
물론 백록담은 볼 수 없었다 해도 말이다.
어느 덧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
산행인들 사이에서 '껄떡고개'로 통한다는
마의 현무암 경사길을 기적적으로 통과하자
숲에 가려졌던 시야가 툭하고 터지면서
믿기 힘든 장관이 그제서야 펼쳐졌다.
이대로 포기하고 내려갈 뻔한 고비를
자책과 위로를 번갈아하며 여러차례 이겨낸 결과
위용한 자태를 드러낸 백록담의 경사면과 마주했다.
운이 좋았다.
날씨도 도운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껄떡고개'에 버금가는 나무계단길이
몹시 길게 이어져있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그 거대한 분화구를 마주하고 있으니
도저히 현실의 것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성판악을 오르면서
체력적 한계로 인해 느끼게 된 온갖 괴로움들이
깨끗히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이곳을 통해 터져나왔을 용암을 떠올려봤다.
그 용암이 흐르고 굳기를 반복해 지금의 한라산
지금의 제주도가 된 것이다.
도저히 인류가 어찌하지 못할 엄청난 힘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온전히 굳혀있었다.
실제로 백록담의 고여있는 물을 볼 수 있는 건
현무암의 특성상 장마때가 아니면 힘들다 들었다.
하지만 그런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 일행 모두
'비교적 무사히' 이곳에 다다랐으며
제주의 기원을 몸소 체험했으니 말이다.
자 이제 내려갈 시간,
'비교적 무사히'
하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