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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sh Oct 31. 2021

나만의 실패 보고서를 쓴다는 것

내 첫 직장엔 날고 기는 선배들이 많았다. 회사 문화는 조금 보수적었고, 선배들의 기에 눌려 조금 의기소침했던 나는 입사 초반 회사 문화에 익숙해지는 게 힘들었다. 누구에게 회사생활의 조언을 묻고 싶었는데, 때마침 경력 15년차의 회사 최고 에이스로 꼽혔던 선배 A가 나에게 저녁 시간을 흔쾌히 내줬다.


그런데,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당시 나에게 조언을 해줬던 선배들은 이른바 꼰대가 많았다. '라떼는~'부터 시작해서, "내가 너라면 말야" "나는 입사 때부터 능력이 탁월했어" 등등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선배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이들은 대개 아랫 사람과 자리에서 본인 혼자 우쭐해지는 바람에 본인이 하는 말이 허풍인지 진실인지, 그것도 아니면 후배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 구분조차 못하는 부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마음 한켠으로는, 선배 A가 다른 선배들처럼 자화자찬에 빠지는 건 아닌지, 괜스레 서로에게 시간 낭비가 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배 A는 달랐다. 회사 최고 에이스였던 그는 사회 초년생이던 내게 푸념과 함께 자신의 신입사원 시절 얘길 들려주길 시작했다.


"내가 너 땐, 회사가 싫어서 도망갔었어. 너무 일을 하기 싫었는데, 운 좋게도 이렇게…."


이 말을 듣던 순간, 조금 충격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꽉 조였던 긴장이 풀렸던 기억이 난다. 선배의 '모난' 얘기에 재밌어서가 아니라, 한참 어린 후배에게 자신의 모난 점을 스스로 밝히면서 인간적으로 다가오려는 그 선배 A가 고맙게 느껴져서다.


그리고 그 선배 A의 모난 점은, 거꾸로 후배에게 "야, 나도 이랬는데, 너라고 안될 게 있겠어?"라는 식의 하나의 격려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론 후배에게 용기를 줬던 한 마디였던 것이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 모난 점을 밝혔다고 해서, 후배 입장에선 그 누구도 선배의 모난 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배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인간적인 태도에 더 큰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선배 A와의 만남이 딱 10년 전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종종 윗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본인의 '셀프 성공' 스토리에 자아도취 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아랫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고, 왜 자신이 잘 나가는지 등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나면 세대 간 차이까지 느껴지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정녕 대화의 기본을 모르는 걸까'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내 스스로의 실패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간혹 후배들이 인생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올 때면, 내 직장생활 중 - 실은 별 대단치도 않는 - 여러 성과를 있는 껏 부풀릴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상황에서 실패했고, 그것을 극복하는데 이런 점이 도움이 됐더라, 라는 식으로 적당히 실토하는 게, 어찌 보면, 후배들 입장에선 훨씬 받아들이기 편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는 후배를 만나면 대개 나보다 사회초년생 시절의 나보다 훨씬 큰 스펙과 역량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좀 더 일찍 사회생활을 했다고 거들먹거릴 게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 낮춰 '그때의 내 자신'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어찌 보면 이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금만 더 부지런했더라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조금만 더 마음을 편하게 먹었더라면…' 식으로 말이다.




후배들을 위한 진심어린 조언은, 어찌 보면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창(槍)이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라고 시대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세대 간 역량 차이도 눈에 띄게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직업을 구하거나 같은 직장에 취업하려 하더라도, 1990년대의 20대와, 2,000년대에 20대와, 2010년대의 20대의 사회생활 출발점과 사회인으로서 필요한 역량과 가치관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엔 그 차이를 알고, 내 스스로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진심으로 내게 조언을 구할 일이 있을 때, 솔직한 내 스스로를 스스로 마주하는 것은 이들의 인생에 그나마(!) 값진 조언이자 격려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난, 언젠가 찾아올 '후배 손님'을 위해, 나만의 실패 보고서를 오늘부터 조금씩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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