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기 좋은 봄날, 춘천행 버스를 탔다. 수인 산업도로를 지나는데 연둣빛 물결이 눈을 사로잡았다. 잎들은 세상에 나와 연두로 물들이고, 나는 새 세상으로 나아가며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잠자고 있던 감각세포들이 하나 둘 깨어나며 심장을 두드렸다. 흡사 조르바가 내 안으로 들어와 춤이라도 추는 듯 순식간에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연둣빛이 어디 내 사는 동네뿐이랴. 영동고속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는 산들도 연둣빛으로 출렁였다. 나도 모르게 ‘예쁘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점점 순해지는 것 같았다. 우린 감정의 동물이고 종종 다른 존재들에게 마음을 투사하는 존재이지만 거꾸로 다른 대상이 우리에게로 들어와 우리들을 바꿔놓기도 하는 것이다. 그 맛에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커튼으로 가리면서도 살짝 젖혀 창밖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몇 시간 후면 TV도 소음도 없는 비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나무들이 뿜어내는 빛에 더욱 빠져들고 있었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이 말이 도드라지게 보인 것은 내 욕구에 와닿았기 때문이리라.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 고즈넉한 공간으로 떠나고 싶다는 욕구였다. 하지만 춘천 산골에 머무르기로 한 것은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보 여행가 김남희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작가가 언급한 장소를 검색하게 만든 것은 다음 문장 때문이었다.
숲에 둘러싸인 곳. 아침마다 뻐꾸기가 울고, 오후가 되면 멀리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곳, 전나무 너머로 달이 둥실 떠오르고, 책과 휴식이 아늑한 공간.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만』, 74쪽)
검색창으로 불려 나온 곳은 숲 속에 들어앉은 목조 건물이었다. 겉치레 없는 건물은 단아한 문장을 닮아 있었다. 보는 순간 이미 결정됐다. 숙소 블로그로 들어가자 거기에 걸어 둔 문장은 이러하였다.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분
자발적 고립이 필요한 분
책과 나무와 별을 보며 쉼이 필요한 분
휴대폰 노트북을 멀리하고 책과 함께 디지털 디톡스를 원하는 분
건물과 분위기만 보고도 바로 끌림이 왔지만 숙소를 설명하고 있는 문구들을 보니 더욱 가고 싶어졌다. 코로나 기간 동안 지칠 정도로 쉬었기에 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책 역시 늘 곁에 있기에 딱히 필요한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숲이라는 것, 와이파이도 잘 터지지 않을 정도로 물질문명과 거리가 있는 곳이라는 것에 쏠렸다. 그리고 더 매력적인 것은 숙소 주위에 다른 건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과 육아로 숨 가쁘던 때에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배낭에 책을 가득 짊어지고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책을 읽으며 쉬고 싶었다. 그때 그토록 원하던 곳이 춘천 산골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책은 빼고 싶었다. 집안에 가득 쌓여 있는 책들, 가방에도 언제나 들어가 있는 책,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아니 머리를 텅 비우고 싶었다. 그러하니 자연 속에 그냥 있기만 해도 대만족이 될 것 같았다.
영화 ‘안경’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한적한 바닷마을로 떠났다. 어디서부턴가 숙소까지 가는 차가 없어 캐리어를 끌고 하염없이 걸어야 했다. 그녀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는 것. 또 다른 영화 ‘해피 해피 레스토랑’에서도 눈이 가득 쌓인 홋카이도의 시골길을 젊은 여성이 캐리어를 끌고 걷고 걸어서 어딘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도착해 문을 두드린 곳은 바다가 보이는 목장이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이끌려 택시도 들어가지 않는 길을 찾아간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분위기와 풍경에 이끌려 춘천의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집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의 집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을 받쳐 줄 피난처가 필요한 것은 세상의 아주 많은 것이 우리의 신의와 대립하기 때문에 우리의 약한 면을 보상해 주는 위안의 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세상의 갖은 사건 사고와 복잡한 인간관계와 일 그리고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피곤해진 몸과 마음이 우리도 모르게 자연이 풍부하고 조용한 곳으로 찾아들게 하는 듯하다. 오십 후반을 걷고 있는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버티고 견디느라 곤고해진 몸과 마음을 안식처로 인도하고 싶었던가 보다.
산골에서 2박 3일 머무는 동안 어떤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냥 자연 속에 나를 놓이게 하자 했다. 꼭 무언가를 해야 하고, 어떤 결과물을 남기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어떤 의미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이 피곤해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걸 맘껏 즐기려는 순수한 마음이 흐려지고 만다. 이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57년의 세월이 걸렸다니!
그래도, 그래도 할 일이 있다면 ‘순간에 마음 기울이기’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내 마음 상태 들여다보기, 그것이면 충분하다.
산에서 뿜어내는 연두로 봄기운을 한껏 느끼고 있다 보니 어느새 춘천에 닿았다. 숙소로 들어가는 버스가 없어 택시를 탔다. 밖으로 보이는 산들을 보자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다. 중학교까지 다니는 동안 그리도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과 비슷한 곳을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 울컥했다. 눈만 뜨면 보이던 나무와 산이 몸 속 어딘가에 깊이 들어앉아 있다가 나를 뒤 흔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