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떠난 아이

by 김건숙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림책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를 가져와 펼쳤다. 방금 산을 돌다가 떠오른 문장들을 그림책으로 쓴다면, 이 책의 그림 스타일이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되었다.


4개월 가까이 숲 속 오솔길을 다니는 동안 보고 느껴진 것들이 있으면 메모장에 열심히 적곤 했다. 오늘 역시 맘에 드는 문장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과 견주어보니 들떴던 마음은 금세 사라지고 기운이 쭉 빠졌다. 그림이 문제가 아니고, 과연 내가 쓴 문장들이 그림책으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는 요즘 읽은 그림책 가운데 가장 많은 여운을 주었다. 일반 그림책은 표지를 열면 면지가 나오고 거기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책 제목과 지은이, 출판사 이름이 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면지 왼쪽에 풍경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문장 5줄이 씌어져 있다.

그때 나는 여덟 살이었다.

방학 내내 공책에 하루 한 문장씩 일기를 썼다.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 적었다.

2학년으로 올라가는 조건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공책을 간직하고 있다.

일기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림책이라 그 형식으로 만든 것 같다. 책을 열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 문장들을 처음 보았을 때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덟 살짜리 꼬마가 쓴 한 문장 일기’라는 것에서 기대감이 생기면서 나도 여덟 살 꼬마로 날아갔다.



‘교회에 갔다.’ ‘친구와 숲에 갔다’ ‘엄마를 바베르 기차역에 바래다드렸다.’ 등의 간결한 문장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그림이 짝을 이루는 이 그림책은 책을 넘기면 황홀감에 빠져들게 된다.

1937년 7월 달로 시작되는 날짜를 보는 순간 2차 세계대전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을 지나 9월 1일에 ‘전쟁이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어 비행기가 하늘에서 날고, 전기가 끊어지고, 집 가까이 폭탄이 떨어진 떨어졌다는 문장과 그림들이 나왔다. 바르샤바는 용감하게 싸웠다는 내용과 포화 그림으로 이 책은 맺는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전쟁의 흔적이 담겨 있다는 점이 안타깝게 했다. 오르한 파묵의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 속에 있다’는 문장이 이토록 잘 맞을 수 있을까. 그 풍경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 예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했겠지만 일기를 쓴 꼬마를 비롯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땠을까? 조종사였던 꼬마 아버지도 9월 9일에 전사했다고 한다. 8월 29일에 ‘아빠가 나를 보러왔다‘고 씌어 있는데 이 때가 아빠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어서인지 그 여운은 더 깊고도 길다.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의무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꼬마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돌아본 뒤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을 연필로 꾹꾹 눌러 썼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깊은 감동을 줄 수가 없다. 내용 중간에는 실제 일기도 수록되어 있다. 90이 넘은 지금도 이 일기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침착하고 내향적이며 감수성이 풍부한 꼬마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꼬마 아이가 쓴 문장들은 그림책으로 손색이 없다. 그럴 뿐 아니라 우리들 가슴을 울리는 빼어난 문장들이다. 다시 읽어보니 내가 쓴 문장들은 시시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혼자 부끄러웠다. 꾸미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꼬마가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말괄량이 삐삐’의 원작인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저자이자 어린이 문학의 고전이 된 수 많은 명작을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글을 쓸 때, ‘오로지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그 아이에 관해서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난 언제나 현재의 나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세상의 틀을 깰 아이는 떠난 지 오래다. 그림책을 쓰고 싶다면, 내게서 떠난 아이를 먼저 불러와야 한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 하면서 '오후 세 시'의 시간이 내게 가장 자유롭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부터 무엇을 했는지 기록해 나가고 있다. 새롭게 바뀐 내 일상이 나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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