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너머로 이어가다
'정말 그렇다'. 이 한 마디로 시작될 공감이 얼마나 그리운지, 마주보고 앉아도 내 눈에만 보이는 '나만의 세상'은 역시 또 열리고 만다. 어느 책 제목처럼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져야 사람으로 산다지만, '같은 세계'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고 언제 즘 나를 찾아올지 행방이 묘연하다.
고민이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상대를 부정하여 자신을 아는 과정은 중요하다. 타의나 강압으로 묘사된 자화상을 지우고 나를 찾는 순서에서 소거법을 굳이 제외시킬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것만 반복된다면 사회는 지속되지 못 한다.
안타깝지만 부정은 배타성이라는 고유한 힘을 지녔기에 자칫하면 혐오의 씨앗을 마음에 심어 병들게 한다. 우리는 '왜곡된 감정으로 폭발한 의지'를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아가 탄생할 가능성의 세상에 산다. 그들은 자신을 긍정하려 세상을 이분하거나 세상 밖을 정의하고 타인을 그곳으로 내몰아버린다.
타인을 내면에서 밀어내어 자아를 찾아낸다 한들 애써 얻은 열매가 공동체의 붕괴라면 소중히 지켜낸 자아를 다시 잃고 말 것이다.
충돌이 쉴 틈 없이 발생하는 현실을 살면서도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부정이 선물한 거부감을 먼지를 털어내는데 조심히 사용했고 스스로를 조금씩 선명히 바라보게 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남았을까? 다른 이들, 세상을 포함해 세상에 가득 찬 자신과 다른 것들을 바라본다. '보게 된 이'는 어떻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 속 너머를 바라보게 될까?
질문과 함께 떠오른 답이 있었다.
사람의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기본 문장이 있다면 '혼자인 사람들이 함께다' 라는 당연하지만 뚜렷한 명제다. 곧 단독자이면서 사회 속 존재인 인간은, 인간 '사이'에서 확장되고 변질되고 소멸하다 재발견된다. 예를 들어보자. 유일, 그 자체로는 고독과 교만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일 수 있어도 사랑이 흐르는 사이에서는 유일함이 고귀 그 자체로 그려지지 않은가. 이 관점이라면, 자아를 넘어서는 '초월'은 특정 인물에게 유일한 자가 된다는 기적과 최소한 동일한 개념을 공유한다.
쓰고 보니 이 글은 촉매제가 되었다. 혐오와 공감을 고민했던 흔적이 낮춰진 발화점을 넘어 완성된 글로 나타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