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순간
한 시인은 절망이 없는 희망을 싫어한다고 했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도 없는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희망을 찾으려 절망의 중심을 들여다보는 일은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일까, 하고. 사실 잘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 일이 그러하듯이 새옹지마가 언제 찾아올지 우린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세월의 풍파가 담긴 지혜를 네 글자로 오밀조밀 묶어놓은들 한 치 앞을 내다보질 못하는 운명들이니 기대감이란 너무 가혹한 천성이다.
분명하다 할수록 흐릿해진다. 그러니 흐릿하므로 나는 분명하다 느낀다. 마음에 안개가 낀 것 같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허공에 모든 것이 멈춰있는 느낌, 우울증이다. 무언가 있으나 없는 것 같은, 무풍지대에 들어온 돛단배의 상태다. 가끔은 이것이 불교의 해탈과 비슷한가, 한다. 그러자면 이건 너무 슬픈 일이다. 분명 있으나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라니.
나는 절망을 들여다보는 일이 희망을 얻으려는 시도와 얼마나 상관있는지 말하려던 참이었다. 글쎄, 상반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아는 방법은 총체적으로 이해하기에 좋을 수도 있다는 게 지금까지 내린 이성적 판단이다. 그런데 나의 직관은 그것보다 더 나아가라고 부추긴다.
가림막이 몇 겹으로 쳐져있는 무대를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눈을 크게 떠도 보이는 것은 두꺼운 직물로 짜인, 고개를 들면 높은 천장에 매달린 커튼뿐이다. 이 무대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무엇이 없는지도 나는 모른다.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조심스레 내디뎌 보는 것일 뿐. 본디 희망이란 눈에 띄는 근거가 없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절망을 품고는 희망을 불러보는 양치기 소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