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랑하자. 그게 유일한 답이다.
셜록 홈즈를 아실 거라 믿는다. 셜로키언이라고 그를 따르는 팬들의 이름이 따로 있을 만큼 소설 속 인물 치고는 생생한 인물이다. 덕후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한 때 그를 추종하던 청소년이었다. 용돈을 모아서 전집을 구매해 그의 행적을 탐독했고 때로는 그에게 나를 투사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처럼 나도 무언가를 잘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홈즈는 과학적 방법론, 곧 자신이 개발하고 발전시킨 독자적 사고체계로 세계를 이해하고 분해했다. 덕분에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잡아내는 데 놀라운 기지를 발휘했지만 그도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모든 대상을 복잡한 기계를 분해하듯 대하는데 그 누가 옆에 있으려 할까. 그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 그의 승패를 기록하는 왓슨 빼고는.
그 덕에 그가 감정을 스스로 억눌러 왔음을 독자들은 알게 된다. 홈즈는 바이올린을 자유롭게 켤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어떤 이유로 사교성은 버렸다. 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것만을 붙들고 예리하게 돌본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오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자, 그럼 내가 무엇을 잘 읽어냈는지, 무엇 때문에 그에게 나를 투사할 정도로 그의 인생을 탐했는지 밝힐 차례다. 난 공감을 잘했고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냈다. 눈치가 좋은 거라 설명하면 쉽겠지만, 굳이 돌아가자면 딱히 그러진 않았다. 눈치라기보다 직관력이 뛰어났다 보는 편이 더 가깝다.
그렇다. 홈즈와는 반대다. 그는 직관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통찰을 구성하는 논리적 구조와 순서를 다 파악할 줄 알았다. 나는 그 과정이 더뎠다. 아무튼 그럼에도 언젠가는 셜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지성미가 넘치는 어른을 꿈꾸었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물론 셜록은 소년의 꿈을 이뤄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아무래도 내 증상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관심이 충돌해서 생겨난 듯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람에겐 변수가 너무 많아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호감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난 셜록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처럼 호기심과 호감 중 무엇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갈등하기만 했으므로 결국 우울증을 앓고 있다, 고 이젠 믿고 있다.
함부로 사람을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하다 보니 마음을 쉽게 내어주질 않았다. 물론 어렸을 적 겪었던 관계에 관한 상처와 충격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긴 했다. 쉽게 내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현실과 읽어낸 상대의 감정을 상세히 설명하면 안 된다는 더 냉혹한 현실을 알기엔 예민한 어린아이였을 뿐이니까.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당신을 나의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 나의 방어체계를 다 통과하고 신뢰를 얻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들이겠다고 마음먹은 주체는 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 나의 치료는 이제야 시작되었다, 고 재차 믿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요즘 사랑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사실 오랫동안 고민했던 주제긴 했지만,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을 치료 과제로 일부 얻고 나서 더 궁금해지는 영역이다. 내가 나를 조금은 내려놓고 의존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나를 확장시켜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로 애가 탔는지, 내가 무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가 아닐까 할 만큼 내 마음을 몰래 기웃거려야만 했다.
자신이 느끼는 정도 차를 타인에게 정확히 설명하려 시도해도 완전히 일치시키기는 어려우므로 방금 전 고백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이것도 고민이다. 스스로를 염탐하다니 무슨 말인가. 자,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겠다.
나는 우선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정도가 그리 크지 않다. 다시 말해 호감이라는 단어의 수위가 높은 듯하다.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관심을 두지 못한다. 그리고 호감의 대상이 성별과 관련이 없다. 무슨 의미냐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거나 모든 사람을 미워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 정도의 차이라는 말인데, 모든 이에게서 호와 불호를 발견한다. 때문에 호와 불호의 경계가 애매하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경우를 빼먹었다. 내가 아직 애정을 경험하지 못한 이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다음은 지금까지 내가 고민해 본 연애와 사랑에 대한 차이점 및 공통점이다. 연애는 상호 간에 맺는 계약이다. 하지만 외사랑, 짝사랑을 보면 사랑은 상호 확인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확인하지 않은 사랑만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연애를 시작하면 사랑이 시작되나? 그것은 너무 애매하다. 연애가 사랑과 동일한 말이 될 수 없다.
누군가는 말로만 떠들지 말고 누구하고 든 사랑을 시작해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런 당신도 나에게 말만 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연애는 감정만으로 시작될 수 있는 낭만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연애는 자아를 그리는 도구를 상대방에게 던지면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자신을 미친 듯이 상대에게 내어준다. 그러다 그 사람이 그리는 내 모습이 싫으면 이내 식어버린다. 낭만도 끝이 나고 주도권을 쥐려 싸운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에게 던진 그 도구를 서로의 손에 다시 쥐어준다. 그리고 조금씩 자아의 영역을 허용한다. 상대의 도구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도록. 때로는 지우고 고쳐낼 수 있도록. 그래서 내 친구가 했던 말처럼, 사랑은 익숙해질 수 있지만 연애는 무뎌지는 것 투성이다.
연애와 사랑은 애정과 애착으로 시작한다는 데서 동일한 지점을 공유한다. 애정이란 상대에 대한 호감을 말하고 애착은 상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접촉과 만남에 대한 욕구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은 한 발짝 더 전진한다. 나를 너에게까지 확장시키는 무리한 공사를 진행한다. 네가 아프면 실제로 아프기로 마음먹는다. 네가 싫으면 나도 싫어보려고 노력한다. 상대가 무엇을 말하기 전에 공감을 시도하고 틀어진 공감을 받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연애는 이 모든 항목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호감은 사랑처럼 의지와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네가 잘되기를 바라는 정도가 내가 잘되는 만큼 좋은 게 사랑이라면, 연애는 때로 네가 잘 되기를 바라는 정도가 내가 잘되지 못하는 만큼 불안하다. 그래서 상대의 성장이 부러워질 때가 있다. 순수한 경외가 아니라 복잡 미묘한 시기심이다. 호감은 반려동물에게도 쏟을 수 있는 감정이다. 사랑처럼 상대의 운명을 책임지려 하진 않는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뿌리가 없는 부유하는 존재,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보았다. 너무 적나라한 표현이자 뼈아픈 충고다. 사람은 기능으로도, 효율로도, 방식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충언대로 인생의 방향을 선택하며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자아를 열고 너의 자아에 뿌리를 내린다. 나의 목적과 책임이 너에게 심긴다.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되어주고 서로에게 정체감을 부여한다. 더 이상 '너'는 아무나, 가 아니라 '나'다. 나의 확장이자, 나의 모든 것이 된다.
셜록은 왓슨 덕분에 살았다고 난 생각한다. 왓슨의 기록 덕분에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식되고, 그래서 인정받았다. 저주받은 해체 능력 탓에, 알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경험 때문에 감정을 눌러왔는지 몰라도 그가 싫어하던 왓슨의 낯간지러운 미사여구 덕분에 살아났다.
뿌리를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뿌리를 내린 식물을 본다. 비 온 뒤 촉촉해진 땅 아래로 뿌리를 내려 단단해진 채소를 본다. 비록 식물과 달리 인간은 땅을 밟고 동시에 떼는 존재로서 영원히 머물 처소 하나 없는 저주받은 실존을 가졌지만, 영원한 뿌리를 공유할 사랑을 가졌다. 그게 답이다. 그것이 사람이 가진 유일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