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빠에야가 아니에요!"
시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제대로 된 스페인 현지 빠에야를 맛 보여주신다며 낮 내내 테네리페에 있는 빠에야 레스토랑을 검색하셨다. 후기가 좋은 한 군데를 골라 예약까지 완료하셨고 저녁이 되자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그곳을 찾아갔다.
스페인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골목이었는데 분위기가 색달랐다. 뭔가 젊음의 열기가 느껴지는, 방콕의 카오산이 떠오르는 그런 곳이었다.
오늘도 우리는 시원한 맥주잔을 먼저 부딪혔다.
어머님께서는 셋이서 먹을 큰 빠에야 하나와 전채요리로 토마토 샐러드를 주문하셨다.
토마토 샐러드는 당연히 맛있었는데 나는 테네리페에 온 후로 양파가 왜 이리 맛있는지 모르겠다. 토마토 위에 뿌려진 검은색은 깨나 후추가 아니라 다름 아닌 소금이었다. 화산의 영향으로 바다가 온통 검은색이니 소금도 검은색으로 생산이 되나 보다. 맛은 별 차이 없지만 꽤 독특해 보였다.
그리고 토마토 샐러드보다 내가 더 열광했던 것은 바로 저 달콤한 캐러멜버터였다. 맨 위에는 고소한 마늘 플레이크까지 뿌려져 있어서 빵과 먹으니 환상적이었다. 시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모두 몰아주셨는데 나는 빵과 함께 마지막까지 긁어먹었다.
드디어 등장한 빠에야!
향이 너무 좋아서 나는 환호했지만 기대가 크셨던 어머님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지셨다. 색깔과 냄새 다 좋은데 빠에야가 이런 게 아닌가요 어머님? (스페인 현지 빠에야가 깐깐한 프랑스인에게 평가당하는 중이었다.)
첫술을 뜨신 어머님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있었다. 난 맛만 좋은데...
"아버님은요? 아버님도 이거 맛없으세요?"
"음...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맛있는 편도 아닌 것 같네."
결국 두 분 모두 몇 술만 뜨시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다.
"너도 억지로 먹지 마라. 억지로 먹다가 탈 난다."
"전 맛있는데요? 물론 어머님이 만드신 것보단 훨씬 못하지만요."
"이건 빠에야가 아니야…"
바로 그 순간 눈치 없이 나타난 점원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맛이 어때요?" 하고 물어왔다. 시어머니께서는 그 직원에게 냉정한 표정으로 빠에야를 신랄하게 평가하셨다. 스페인어로 말씀하셔서 나는 못 알아들었지만 서글서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점원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드는 걸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그 직원은 그 후부터 우리 테이블 근처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시어머니께 단단히 삐친 것 같았다.
"점원이 불친절하네요?"
내 말에 어머님께서 피식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 내가 말을 심하게 해서 그래."
"저 가엾은 젊은이에게 뭐라고 하셨나요?"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이건 빠에야가 아니다. 데자스트흐(재앙:désastre)다. 관광객 상대라고 대충 만든 거냐. 뭐 그 정도...(본인이 말씀하시면서도 웃으심) 근데 다 말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풀렸어. 저 젊은이를 위한 팁은 남겨줄 거야. 꽤 놀랬을 거다."
역시 우리 어머님은 하실 말씀은 다 하시는 분이다.
“이거 2-3인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양 엄청 많은데요?”
“이거는 열명이 와도 다 못 먹어.”
“맛이 없어서요?”
“그렇지!”
나는 배가 부를 때까지 혼자 계속해서 먹었고 특히 해산물은 쏙쏙 다 골라먹었다.
이때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오더니 우리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맑은 두 눈을 거부하지 못하신 어머님께서는 결국 빠에야에 있던 작은 닭고기 조각을 닦아서 건네주며 강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 맛없는 거라 안 먹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먹을 거야?"
맛있게 받아먹은 강아지는 점점 더 애절한 눈빛을 보냈고, 어머님께서는 어쩔 수 없으시다는 듯 강아지를 위해 닭고기살을 몇 개 더 골라내셨다. 결국 나랑 강아지만 만족스러웠던 저녁식사였다.
시부모님은 거의 안 드셨기 때문에 어떻게든 내가 계산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래도 시원한 저녁공기를 맞으며 호텔로 걸어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배가 불렀기 때문에 더 좋았던 것 같다.)
천천히 시아버지 걸음에 맞춰서 20분 정도 걸었는데 밤거리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런 곳에 사는 것도 참 좋겠다. 유러피안들이 사는 동남아 같은 느낌이랄까.
아버님께서는 도중에 젤라토집 앞에서 멈추셨다. 역시 저녁이 부실하셨던 것이다.
나는 빠에야 맛만 좋던데 뭐가 잘못됐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 친정엄마는 내 입에 쓴 건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워낙 다 잘 먹어서. 아마 시어머니께서도 지금쯤 그 말에 공감하고 계실 것 같다.) 어머님 말씀으론, 빠에야 소스를 잘 만드는 게 중요한데 이 레스토랑에서는 인스턴트 가루를 쓴 것 같다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 어머님께서는 조식을 드시다가 혼자서 갑자기 웃으셨는데 내가 왜 웃으시냐 여쭈니, 어제 빠에야집 점원이 떠올랐다고 대답하셨다. 그 청년은 영문도 모른 채 말로 따귀를 몇 대나 맞은 기분이었을 거라고. 실제 그 점원은 우리가 계산서를 달라고 불렀을 때도 계속 꽁한 표정이었다.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건 빠에야가 아니라 데자스트흐(재앙:déastre)였어."
나는 데자스트흐라는 단어를 또 하나 배웠다. 역시 시어머니의 표현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