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용 Jun 24. 2023

어머님, 매니큐어는 제가 칠해드릴게요.

2022년 8월 12일


토요일 오전 남편은 수면 무호흡 때문에 전문의와 면담을 받으러 가고, 나는 점심때 삼겹살을 먹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갑자기?)

깻잎을 따러 시댁에 갔더니 남편이 시댁 현관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닌가?

시댁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 내 남편.
하지만 나 깻잎 좀 먼저 딸게.


나 혼자 먹을 거라 딱 13장만 땄다. 남편은 1일 1 식중이라 저녁때부터 달린다. (나는 낮부터 저녁까지 달리고.)

인사하려고 다가오는 이스탄불과 모웬에게 깻잎을 내밀어봤더니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확실히 얘네는 깻잎 절단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얼마 전 시아버지께서 사 오신 굴 화분에 꽃이 피었다. 꽃이 안 핀다고 하셨었는데 이렇게 작고 소중한 파란 꽃이라니!!

그런데 이 자리는 옆집 고양이 틱스가 항상 담장을 넘어 다니는 길목에 있어서, 틱스가 화분을 밟을까 봐 심히 걱정이 된다. 이스탄불이 항상 지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별로 미덥지는 않은지라...


시부모님은 커피, 나는 녹차, 남편은 탄산수를 마셨다.

어머님께서는 에어프라이어를 중고로 사셨다며 갓 튀긴 감자튀김을 맛 보여주셨다. 나 혼자 다 집어먹은 것 같다.


"깻잎은 나한테 시켰으면 내가 따갔을 텐데..."

남편이 시댁에 잠깐 들렀다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내가 그걸 못 본 것이다.

"괜찮아. 다음번에 내가 깻잎 따오라고 부탁하면 이렇게 13장만 따다 주면 돼, 알았지?"

어릴 적에 친정엄마가 앞마당에서 깻잎을 따오라고 시키실 때면 나는 꼭 몇 장을 따야 되는지 되묻곤 했다. 엄마는 평소에는 50장, 손님이 있을 때는 100장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럼 나는 한 장 한 장 세면서 땄고, 다 따고 나서도 몇 번씩이나 다시 센 후에 갖다 드렸다.

파란 하늘과 알록달록한 꽃들이 너무 예쁘다.

갓 튀겨서 따끈한 감자튀김을 집어먹으며 예쁜 꽃들을 감상하고 있을 때 어머님께서 갑자기 발을 올리시며 말씀하셨다.



"이거 봐라, 예쁘지??"

음... 발톱에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셨는데... 자세히 보니 너무 삐뚤빼뚤 칠해져 있었다. 나는 순간 대답을 못한 채로 머뭇거렸다.

"왜? 안 예쁘니?"

"... 예뻐요! (끄덕끄덕) 근데 안 예뻐요.. (도리도리)"

내 대답에 온 식구들이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아, 색깔은 예쁜데 안 예쁘게 칠해 놨다는 소리지? 그건 맞아. 내가 허리가 안 구부러져서 칠할 때 좀 힘들었거든. 호호"

역시 어설픈 내 프랑스어를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 시어머니시다.

"제가 다시 칠해드릴게요."

"아니, 나는 이대로 만족해. 마음에 들어."


잠시 후 아버님께서는 정원에 내려가셔서 꽃들에게 물을 뿌리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어머님은 이스탄불의 털을 빗으셨다.

이스탄불은 목이 갈라지는 소심한 목소리로 야옹거리며 요리조리 왔다 갔다 움직이고 어머님은 그런 이스탄불을 열심히 따라다니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랑 자서방은 웃었고, 웃는 우리를 보시며 어머님은 즐거운 표정을 지으셨다.



특별할 것 하나 없었지만 그냥 완벽하게 느껴지는 주말 오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시댁 테라스는 동네 사랑방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