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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May 30. 2024

우울에는 이름이 없다 초고 #1


 보통 명도 짙고, 바다 저 깊은 곳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이미지나, 술에 취해 비틀대는 모습과 연관 짓기 쉽다. 하지만 그런 우울이 아닌,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우울이 있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우울이 있는 법이다. 나의 우울은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온다. 나는 양극성장애 2형, 흔히들 조울증이라고 불리는 병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내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을 테니 그 이야기는 넘어가고, 내 우울에 대해, 그리고 내가 그걸 넘기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우울은 가장 맑을 때, 무겁고 어두운 구름처럼 갑작스레 찾아온다. 조울증이란 그런 것이다. 기분이 고양되어 있다가 저 아래 진창으로 처박힌다. 행복한 순간에 그 구름은 어김없이 나를 덮친다. 사람들은 나의 밝은 얼굴 뒤에 숨겨진 어둠을 알지 못한다. 우울은 마치 오래된 시계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가고,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무력하게 갇힌다.


 내가 그 우울을 넘기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그저 우울을 인정하고, 그것이 내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울이 찾아오면 나는 그것과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조용히 맞이한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이 문을 열어준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지느냐? 아니다. 내가 말했듯이 나는 평범하고,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눈물이 나면 울고, 씻기 싫으면 씻지 않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무기력하게 누워있다.


나는 특별한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의 방법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우울을 견디고 넘기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나에게 평온함을 준다. 나는 그저 우울을 바라보고,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마치 파도가 밀려왔다가 사라지듯이, 우울도 결국은 지나가리라 믿는다. 해치우는 방법을 찾은 게 아니라 이 녀석이 지나갈 거라는 종교적인 수준의 믿음이 생긴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는다면 좋겠지만, 그게 나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경험을 이야기할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도 아닌 채로, 내 우울을 넘기며 살아간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방법으로 우울을 넘긴다.


 나의 우울은 해 질 녘 6시, 신호등 앞의 파라솔과 같다. 실물은 왼쪽에 있지만, 뜨거운 볕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른쪽에 서야 하는 그런 존재다. 내 그림자는 길어져 뒤로, 오른쪽으로 늘어나고 있다. 내 우울 속에는 온갖 사람들이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나는 숨을 죽이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신호가 바뀌면 사람들은 건너가고, 나는 빈 햇빛 가리개로 남는다. 그 속에서 나는 다음 사람들을 채우고, 신호를 기다리며, 그림자가 더 이상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하지만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오고, 밤이 되듯 당연하게 마음은 깜깜해진다.


 나의 우울은 사물과도 같다. 남들이 보기에 알 필요가 없는 무생물, 아무런 생명도 감정도 없는 존재와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진다. 사람들은 우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평범한 물건처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우울은 길가에 오래도록 방치된 대형 폐기물과도 같다. 누군가 치워주길 바라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저렇게 크고 눈에 띄는데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우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작업을 한다거나 글을 쓰다가 괴로워지면, 그것은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꼈다거나,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느끼는데서 기인한 고통이다. 사는 것도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냥 태어났으니 살아가다 죽어가는 거지.'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처럼,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로 인해 내 기준 큰 일을 벌이거나 일을 망쳐도 내 주변에 큰 타격도,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 점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래서 우울을 다시 쓰자고 해보았다. 내 우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


 부유하는 먼지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적은 적이 있다.


 현관에

 바람 불면 짤랑 거리는 작은 종을 걸어둔다.


 겨울에는 튤립 구근을 사다 심어 봄이 오면 솟아나는 봉오리들을 보고 웃고, 해바라기씨를 뿌려서 여름 기분을. 가을에는 코스모스. 그 옆에는 동백나무를. 바닥에는 사계절 푸른 맥문동을 깔아 둔다. 아득히 머나먼 노년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죽어간다. 산산조각 난 정신에 찔리고. 모래처럼 흩어지는 마음을 긁어모아도 담아내지는 못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자문하며 기계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젖은 빨래를 털어낼 때 공기 중에 튀어 오르는 자잘한 물방울과 부유하는 먼지들이 볕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면.


 너는 저것들보다 빛날 수 있는가?

 질문한다.


 먼지와

 나


 먼지보다 쓸모 있는가 생각해 보는 것은 먼지보다 쓸모없는 생각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우울하지만 밥을 먹을 것이고, 빨래를 돌릴 것이고, 시를 쓸 것이고, 가드닝을 하고, 독서를 하고, 육아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것이다. 단지 등에는 거북이처럼 우울을 등에 달고,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위해 운동을 하면서.


 우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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