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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May 31. 2024

새기는 우울;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평생 거기서 살 줄 알았다. 

결혼도 했었고 한국이 싫어서. 


그렇게 외국에서 살 거라고 유난을 떨었는데 한국으로 돌아왔다. 분하게도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나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건 내 몸뿐이었다.  그 나라에서 그렇게 터부시 되던 타투를 했다. 나를 우울에 빠뜨린 것에 대한 작은 복수심이었다. 나의 첫 타투는 왼쪽 어깨에 새긴 작은 나비 2마리였다. 그 나비들은 우울의 시작이었던 일본에서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나와 내가 원하고 선택한 장소를 향해 훨훨 자유롭게 날아가는 나였다. 


흔히 타투는 한 번하기 시작하면 ‘중독’이 된다는 말이 있던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는 했다. 타투를 받을 때 느껴지는 통증을 일종의 자해처럼 감정을 숨기려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우울해도 자해는 하지 않았고 엄살도 심해 그 통증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작은 타투였는데도 아팠다. 등판에 호랑이나 용 키우는 사람들은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들이 맞다.


그런데 왜 ‘중독된다’는 말에 동감을 했냐 하면 그 ‘통증’에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그 타투에 새긴 ‘의미’에 중독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몸 곳곳에 작게 ‘의미’를 새긴 타투를 새겼는데 내가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는 타투는 왼 손목 안에 있는 세미콜론 모양의 타투이다. 작년에 프로젝트 세미콜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 프로젝트 세미콜론;은 우울증, 불안 장애, 중독, 자해 및 자살 시도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 보내는 캠페인이었다. 


나는 숨기고 있었다. 내가 죽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내가 죽고 싶을 만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드는 양가감정, 한편으로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는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끈을 잡고 있었다. 세미콜론 모양의 타투를 새긴 건 그 끈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누군가 물어봐주길 원했고 누군가 물어봐주면 죽지 말라고 해줄 것 같았다. 


언젠가 아끼는 친구가 내게 네가 우울증인 거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편견인가 싶어 섭섭했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도 돼서 굳이 짚고 넘어가진 않았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나 얘기하던 중 나는 잠시 무너져 앉았다.


"사실은 나도 아픈데 너처럼 다정하고 좋은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맘대로 판단하고 색안경 끼고 볼까 겁이 났어." 


내가 그 친구의 말에 무너져 앉은 건 내 두려움과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죽고 싶을 만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 아픔을 알고 나를 어떻게 볼까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 두려움의 이름은 ‘편견’이었다.


그 친구가 내게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지 못했던 것, 내가 그 친구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묻지 못했던 것은 아마 우리는 스스로조차도 아픔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쏟아질 그 말들이 두려웠을 테니까.


나와 아끼는 친구의 두려움에 직면한 후 이 프로젝트 세미콜론;메시지가 단순한 응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세미콜론은 글쓴이가 문장을 마칠 수 있음에도 끝내지 않는 부호, 즉 이 세미콜론은 삶이라는 문장을 끝낼 수 있음에도 끝내지 않겠다는 삶의 주도권에 대한 투쟁이자 편견에 맞서는 삶, 나의 우울을 사랑하기로 한 삶에 대한 선언이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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