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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19. 2024

일기는 일기장에 #04




나는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지하철을 탔다. 서서 음악을 듣고 가는데 앞의 두 명이 이상했다. 노인이 계속 남자아이한테 뭐라 말하며 전화번호를 억지로 찍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어폰을 뺐다.


"선생님, 옆에 학생 아는 학생이에요? 학생, 아는 어르신이에요?"


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삿대질을 했다. 거 모르면 오지랖 좀 부리지 말지. 노인은 다음 정거장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도망갔다. 학생, 괜찮아요?


"네. 종교권유셨는데 전화번호 억지로 가져가려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가 민망할까 봐, 오늘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서연이도 자주 저랬는데, 청순하게 생겨서 매가리가 하나도 없어 보이니까 종교권유가 맨날 붙고, 주변에서 도와주지도 않고. 서연이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처량 맞게 나왔다. 집에 가서 어제 못 읽은 민서 시절 일기장을 읽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하차하고 거리를 보는데 마로니에들이 푸릇푸릇했다. 땀이 주룩 흘렀다. 그래도 에스컬레이터를 일부러 피해서 계단을 올랐다. 집이 멀게 느껴졌으면 했다. 하지만 집에는 도착했고, 탁자 위에는 가지런히 놓아둔 06년도 일기가 있었다. 저 일기장이 무어라고 이렇게 도망치고 싶은 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다른 짓을 했다. 설거지를 하고 창틀을 닦고 빨래를 돌리고 천 원짜리 원고를 써서 보내고 끼니를 해결하려 월계수잎을 한 장 넣고 끓어오르는 물에 닭가슴살을 삶고 한입크기로 잘라 당근, 셀러리, 완두콩, 병아리콩과 함께 그릇에 소금, 후춧가루, 올리브오일을 뿌려 먹었다. 와그작와그작 먹고 커피를 타서 멍하니 일기장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펼쳤다.


너의 일기장엔 적혀있었다. 너희 어머니는 네가 밥을 잘 먹으면서도 날씬하길 바랐다. 너는 잘 찌는 체질이었고, 너희 어머니는 살찐 너를 혐오했지.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아끼고 아끼다가 월경이 시작되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었지, 너는 휴지를 말아서 덧대다가 아래가 문드러져서 덧나기도 했다고 했지, 만화책도 판타지 소설도, 그냥 문학도 너는 가리지 않고 읽어댔지, 글자라면 게걸스럽게 읽었지. 너희 어머니는 너를 증오했지, 너만 없었다면, 너만 없었다면, 재수 옴 붙은 년이라고 하셨지, 매일 쳐 논다고 욕을 하셨지, 살을 빼라고 지긋지긋하게 말씀하셨지, 왕복차비를 받아써야 하는데 충분치 않아서 갈 때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학교를 갔지, 올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돈 없는 게 티가 날까 봐 버스를 타고 왔다고 적혀있었다.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봤다는 일기를 보고 나는 웃었다. 그래, 그게 벌써 이렇게 오래된 영화구나, 돈이 없는데도 친구들 따라서 보드게임을 하고 싶어서 너는 작은오빠의 돼지저금통에 가위를 집어넣어 동전을 훔쳤지, 지폐가 아닌 오백 원짜리를 지불할 때 부끄러워했어, 일기장에는 결혼 같은 건 죽어도 안 한다고 쓰여있는데, 너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었단다, 게임을 좋아했지, 던전 앤 파이터라는 게임을 하고 거기서 용돈을 좀 벌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너보다 더 구질구질하게 살던 외사촌동생을 만났다고 적혀있다. 너는 왜 착하게 살고 싶었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박처럼 되뇌었지, 붉은색으로 죽자는 말이 도배되어 있는 어느 하루가 적힌 페이지에는 작년인 2023년 7월 13일 참 잘했어요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 페이지를 하염없이 안고 다시 울었다. 올해도 견뎌내고, 참아내다가 10년쯤 뒤의 너에게 참 잘했어요를 적어줄 수는 없었니? 나는 2006년의 너를 다 읽지도 못하고 또 무너졌다.


네 고운 얼굴을 이제 볼 수가 없어서, 남은 거라곤 휴대전화에 저장된 너의 어린 시절뿐이어서, 네가 아이를 낳고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아서 나는 너무 슬펐다. 늙는다는 것은 참으로 서러운 일이었다. 네가 눈앞에 어른어른거리는데 벌써 얼굴이 생각나질 않았다. 영정사진. 너의 영정사진만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너는 분명히 음울하고 우울하게 내 곁을 떠났는데, 내 상상 속의 너는 왜 해맑고 곱게 웃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네가 태어났을 때 슬쩍 갖다 대보았던 내 손가락을 쥐던 너. 너는 내 딸도, 친동생도 아니면서 왜 내게 고통을 주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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