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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18. 2024

일기는 일기장에 #03



너는 우리 집에 자리한 커다란 몬스테라 옆에서 배를 양껏 내밀고 아저씨 흉내를 내면서 말했지.


"은채 씨는 사교성이 없어. 언니, 대체 뭘 해야 사교성이 있는 여자가 되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다들 그러고 살아. 무시하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데, 서윤이가 끼어들었다. "엄마, 우리 돈 없어?" 서연이는 서윤이의 입을 막으며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하고 간지럽히자 서윤이가 깔깔 웃었다.


"애가 왜 저런 말을 해?"

"진짜 돈 없거든. 내가 이제 공장 다니기 시작해서 그렇지, 신랑 혼자 외벌이 할 때 돈 모자랐어. 이제 돈 안 모자랄 거야."

"애 앞에서 그래도 돈, 돈 거리지 말아."

"안 그랬는데... 내가 뭐 사려고 할 때 에구 돈 없다. 하고 어플 닫는데 그걸 들었나 봐."

"요즘 애들 정말 일찍 철든다."


아들인 종현이 서윤이와 놀아주는 모습을 보다가 옆에서 한숨 쉬는 서연을 보았다. 또 왜 한숨이야. 시어머니가 아들은 언제 낳냐고 묻는 거 생각나서, 종현이 보니까. 그거 무시하기로 했잖아 루프안 했어? 했지. 정말 낳아야 하나? 더 늦기 전에? 돈 없다며. 맞아. 우리 능력 안되는데 어머니는 그런 거 애 낳아보면 다 키워진다고 자꾸 그렇게 말씀하셔. 눈물이 잦은 서연이 또 글썽거리다가 천장을 보았다.


"언니 다들 사는 거 힘든 거 맞지? 나 너무 힘든데 소영언니한테도 힘들다고 못하겠어."


소영, 서연, 나까지 결혼 전에 셋이 정말 즐거웠다. 해외여행도, 먼바다여행도, 그냥 가까운 술집에서 술을 마셔도 항상 함께였다. 서연이는 혼자서 여행 다니는 것도 좋아했다. 자유로운 영혼. 딱 그녀를 일컫는 말 같았다.




"나 왔어."


남편이 집으로 들어오더니 현관에 리빙박스가 뭔지 묻지도 않고 받아서 살포시 현관 안으로 들여놔 준 그는 나를 꼭 안고 천천히 펭귄처럼 뒤뚱뒤뚱 뒷걸음질 쳤다.


"은지야, 저 박스 뭐예요?"

"응... 서연이 편지들이랑 일기래. 제부가 줬어요."


그는 나를 더 세게 꽉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리고 왈츠를 추듯 움직였다. 나는 그의 발등 위에 발을 올렸다. 그에게 서연이의 장례식은 혼자 다녀오겠다고 해서 여태껏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 나는 응원해 줄게요."


이 사람은 내 추종자다. 내가 무명작가여도 무조건 팬이다. 내 글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살면서 힘들어질 때마다 이 사람 덕분에 힘이 생겨났다. 몸가짐새도 나볏하고 외모도 준수한데 어쩌다 나를 사랑해서 나와 함께 살아준다고 나는 항상 그렇게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버틸 수가 있었는데 서연이는 아니었던 걸까. 제부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서연이 곱게 생긴 만큼 제부도 인물값을 했다. 그가 바람을 피웠냐 하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오는 여자들을 막지 않았고, 술을 좋아했고, 담배를 피웠고, 게임을 좋아했을 뿐이다. 확실히 그를 정의할 수는 없다. 사람이 법적으로 죄를 지었냐 하면 그도 아니니까. 그저 서연이는 외딴곳에 시집와서 홀로... 혼자서, 피가 섞인 건 서윤이 뿐이었는데. 외로웠을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은지 네 편이야."

"알고 있어. 고마워요. 근데 나 살쪘지?"

"괜찮아. 그냥 네가 건강하기만 하면 돼. 네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 근데 살이 찌면 아플 확률이 높잖아. 그게 걱정되는 것뿐이야."


이번에는 내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힘들면 읽지 말아요.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에 도리어 힘이 나서 그에게 말했다.


"소설 읽듯이 읽으면 될 것 같아. 그러면 될 것 같아요."


함께 저녁을 먹고 씻고 방 안으로 들어온 나는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년도가 뒤죽박죽이어서 고민하던 나는 제일 첫 번째 올려진 2006년의 일기장을 보았다. 너는 이때 고등학생이었지. 나는 대학을 다닐 때였고, 종종 만나 맛있는 걸 사주곤 했는데 네가 기특하게 알바를 했다며 내게 식사를 사준날 친동생 같아서 기특하고 대견해서 나는 울어버렸지. 나는 무릎을 동그랗게 말아서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렸다. 엉엉 우는 소리에 신랑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등뒤에서 나를 안아주었다. 짐승소리가 났다. "서연아, 서연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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