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아들인 종현은 너를 친 이모처럼 따랐다. 나이차이 많이 나는 누나같이 따랐다고 봐도 좋겠다. 네가 죽고 나서 종현이는 방에 틀어박혔다. 내 정신 하나도 추스르지 못해서 그 아이를 잠시 내버려 뒀는데,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통화 가능하실까요?> 그럼요. 바로 답장을 보냈고 전화가 이어졌다. 아이가 요즘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대답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에서 지도를 좀 해주십사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아이를 잠시동안 내버려 둘 수는 없는지 여쭈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학교로 직접 방문 가능하실까요? 대면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네. 내일 일 끝나고 가겠습니다."
종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공부로 스트레스 준 적 없다. 그저 건강하기만 바랄 뿐인데 아이 혼자서 대견하게 잘해주었던 것뿐. 친한 이모가 죽었는데 멀쩡할리가 없다.
아침에 힘을 내보고자 이부자리를 박차듯이 일어났다. 씩씩하게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와서 닭가슴살을 구웠다. 구워진 고기를 집게로 들어 가위로 적당히 잘라서 소금과 후춧가루를 뿌리고 베란다로 나가서 로즈메리를 잘라와서 올렸다. 사과를 깎아서 깍두기처럼 썰고 셀러리도 잘게 썰어서 함께 담았다. 모둠 견과류 통에서 한 줌을 집어 뿌리고 마요네즈와 겨자를 섞어서 만든 소스를 투박하게 올려서 비벼먹었다.
식곤증이 가시고 기운이 나자마자 학교로 방문했다. 조금 예스럽게 울타리를 따라 장미를 심어두었는데 머리가 커서 화려하니 보기가 좋았다. 경비실에 먼저 들러 이야기를 하고 임시출입증을 받아 목에 걸고 교무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놀면서 내는 비명소리, 복도에 퍼져있는 음식냄새, 더위에 날아다니는 파리, 깨끗했지만 파리는 어디에나 있다. 2층 교무실로 앞에서 노크를 하자 안경을 쓴 나이 많은 여자 선생님이 문을 절반만 열어보였다.
"1학년 3반 종현이네 엄마인데요..."
여자는 인상을 와그락 구겼다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리고 아이의 담임을 크게 불렀다. 여자와 내 사이로 헐렁한 체육복을 입은 아이가 실내화를 쩍쩍 소리 내며 끌고 나가는데 뒤통수에 대고 늙은 선생이 날카롭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종현의 담임선생을 불러주었다.
"서 선생님! 종현학생 엄마랍니다."
저 멀리서 종현의 담임선생님이 몸을 일으켰다. 인사를 서로 꾸벅해 보이고는 가까이 가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자를 어디선가 그가 당겨왔다. 푸른빛이 도는 파티션을 등뒤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커피 드시겠어요? 아니요. 저야말로 마실 거라도 사 왔어야 되는데.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사 오지 마세요."
종현의 담임 선생님은 통통하신 체격의 과학 선생님이다. 당연히 입학식 때 빼고는 볼일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가 아끼던 동생이지만 종현이한테도 친한 이모여서요."
"뭐, 그럼 첫사랑이라도 돼요?"
담임선생님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까 교무실 문을 열어준 여자 선생이 언제 와 있었는지 파티션 옆에서 듣고 있었다. 명백하게 불쾌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학부모님들은 잘 모르죠."
"양 선생님, 수업 안 들어가세요?"
종현의 담임인 서 선생이 당황해서 중재하려 했지만 나는 이미 눈꺼풀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모멸감에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가 체면이 돌이 되어 눌러주었다.
"아니, 엄마친구가 죽은 건데 왜 자기가 난리야. 요즘 애들은 정말 이해가 안 돼."
"이보세요!"
나는 또 분노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서 선생님이 티슈를 급하게 뽑아주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양 선생님! 선 넘지 마시고 할 일 하러 가세요!"
나는 그 여자의 머리채라도 잡고 싶었다. 안경을 잡아서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밟아서 으깨버리고 싶었다. 네가 지금 내 친구와 아들을 모욕했노라고,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진상 부리고 싶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방금 그 선생님 성함이랑 교장선생님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아이고, 종현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양 선생님이 종현이를 원래는 예뻐했는데 말이죠."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교무실에서 중앙계단을 통해 정문으로 나가는데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만 들어도 아들 뛰는 소리였다.
"엄마, 엄마, 나 왜? 나 때문에 온 거예요?"
나는 땀이 비 오듯이 나는 그 아이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주었다. 아니 정기면담이래, 이런 게 있다네. 키가 벌써 나보다 자란 아들이 내게 맞춰주느라 고개를 숙였다. 한번 안아주고 가고 싶은데 너무 덥다.
"엄마는 매정해."
아들이 와락 안고는 다시 학교방향으로 달리는 시늉을 하며 제자리 뛰기를 했다.
"저 수업 들어가요!"
그리고는 달려 나갔다. 나는 애써 밝게 보이려 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또 가슴이 시렸다가, 아까 그 미친 선생이 떠올라서 이가 바득 갈렸다. 감히 그런 이상한 소리를. 화가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진통제를 먹고 탁자옆에 비스듬히 세워 둔 서연이의 일기장을 꺼냈다.
일기장에 반창고와 함께 이니셜 S가 적혀있었다. 네가 첫사랑에 아파할 무렵이었구나. 아까 그 불쾌한 이야기가 맴돌았다. 종현이와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일기장을 읽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시험이 끝나고 무성영화를 보았다고 적혀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불법으로 CD를 구워와서 영화를 보았다고, 이제 곧 해가 바뀌고 친구들과 다 같은 반이 되었으면 좋겠노라고 적혀있었다. 영화티켓이 붙어있었다. 쏘우 2였다. 잔인했을 텐데, 쫄보인 네가 은근 이런 걸 잘 봤구나.
집 분위기가 좋은 날엔 조잘조잘 일기장에 단정한 글씨로 하루가 적혀있었다. 그리고는 네 얼마 안 되는 아르바이트비를 어머니가 다 가져가버린 뒤로 욕설이 적혀있었다. 검은색 볼펜이 나오질 않아서 다 떨어지는 바람에 색깔볼펜으로 적어둔 일기 때문에 눈이 아팠다. 아르바이트비를 모아서 안경을 샀다고 적혀있었다. 기특했다. 곧 이어지는 페이지에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적혀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안타까운 한숨이 나왔다. 대학을 가고 싶다고 너희 어머니께 말했더니 어머니가 네게 이기적인년이라며 아파트 베란다에서 네 티셔츠 목덜미를 잡아 흔들고는 떨어뜨리려 했다는 걸 알았다. 네 기구한 팔자의 아주 일부분을 엿보고 나는 눈앞이 갑자기 아찔해져서 일기장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