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종현이는 좀 괜찮아?"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였는데, 당신이 대화 좀 나눠볼래? 난 산책 다녀올게요."
남편과 아들이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나는 공원으로 나왔다.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돌았다. 걸으면서도 속이 시끄러웠다. 오늘은 몸이 조금 지칠 때까지 걷고 싶었다. 우리는 정말 여기가 편해서 오게 되었다. 신랑 직장도 가까웠고, 학교도 인접해 있어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서든 알바를 구할 수 있었고, 그러니까 설명을 장황하게 할 필요 없이 편하다는 것 하나였는데, 아들은 편하지 않는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우리 집안은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나는 흔들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서연이 죽고 나서 뭔가 다 흐트러지는 기분에 눈앞이 아찔하다. 내가 지금 정신이 건강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걱정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아들도 상담을 받아봐야 할 것 같았다. 걸음을 집으로 돌려 도착하자마자 둘을 확인했다. 둘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복숭아를 잘라 나누어서 껍질째 먹고 있었다. 뭔가 안심이 되었다. 나 왔어. 덥다 오늘 밖에. 잠시 입을 열지 못하다가 종현을 보면서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네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는 종현아, 네가 상담을 좀 받아봤으면 해. 너는 어쨌건 성추행을 당한 거야. 단어가 아주 이질적이고 불쾌할지 모르지만. 그게 맞아. 너는 피해자고, 아직 미성년자라 우리가 나서서 너를 보호할 거야."
종현이의 뜨악하는 표정을 보자마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씩씩한 아이라서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니라고 절레절레 거절하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까 한 번이라도 되니까 상담한 번만 받고, 나머지는 엄마아빠가 알아서 할게. 아들은 바로 대답했다.
"저는 일 커지는 게 너무 싫어요."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 아는데,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어. 특히 그 교사가 너랑 함께 앞으로 2년 반을 지내야 한다는 게 너무 엄마로서는 걱정이 되고 그래. 종현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일이 커지는 건 싫었지만, 앞으로 계속 그 선생과 함께 지낸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 듯했다. 마음 복잡할 테니 방에 들어가서 게임도 좀 하고 책 읽고 싶으면 읽어도 좋고 쉬어. 아들이 들어가고 남편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경찰서에 알리는 게 좋을까?"
"그게 우선순위겠지, 법적으로 싸워야 할 수도 있어. 그럼 비용과 시간이 들 테니 그것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아이 탓이 아니니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왠지 한숨을 쉬면 아이를 탓하는 게 될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심란해지니 도리어 식탁 위의 서연의 일기에 눈이 갔다. 나는 말없이 자리를 옮겨 팔락거리며 지난번 읽었던 자리까지 다시 읽어나갔다.
취업준비로 너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집안에서 싸움이 있었구나. 작은오빠와 엄마가 싸워서, 너는 목매달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목메단 사람의 그림은 아주 유치한 뼈다귀 같은 그림이었다. 커뮤니티 일촌친구들을 할 때였다. 4월은 너에게 평화로운 달이어서 푸르디 푸른색 형광펜으로, 공중전화 카드를 붙여두고 꾸며두었다. 친구가 너의 귀걸이를 잃어버려서 너는 매우 속상해했다. 너는 5월에 감기로 앓았고, 아무도 연락을 해주지 않았다. 너는 클래지콰이, 휘성, 박정현, 머라이어캐리, 웨스트라이프를 듣고 다녔다. PC방 좋은 곳을 발견해서 기뻐했다. 거상이라는 게임을 잠시 했었고, 만월의 밤, 모비딕이라는 책을 읽었다. 거기에서 너는 좋은 구절을 적어두었다. 별똥별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바로 서적을 검색했다. 책은 절판되어 있었다. 중고로 책을 주문했다. 네가 읽은 걸 따라 읽고 싶었다.
알바 시급이 삼천 원이었다는 말에 놀랐다. 06년도 아르바이트 시급이 3천 원, 지금 24년 시급이 9,860원. 가파르게 올라갔구나. 저녁 6시부터 밤 열 시 반까지 너는 알바를 했다. 손님이 오면 밑반찬을 내오고, 불판을 갈고, 손님이 나가면 인사하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밥상에 남은 고기를 먹고, 주방에서 일하던 남희 이모가 냉면도 해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줬다고, 일 끝날 무렵에 또 쫄면 해주시고 수박도 잘라주셨노라고 적혀있다. 06년 5월 10일 너는 행복했으면 되었다. 귀여웠다. 귀여워서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