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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25. 2024

일기는 일기장에 #08


나는 티브이를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텀블러의 때가 지워지지 않아서 그릇에 식초를 떨어뜨리고 담갔다 뺏다 하며 칫솔로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이 주 이어지는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쿠르스크 기습 공격이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러시아 측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러시아 분석가들을 인용해 21일 보도했습니다.

년 넘게 자국 영토에서 방어에 주력해 온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6일 미국과 독일 등에서 지원받은 장갑차 등 무기를 앞세워 러시아 남서부의 접경지 쿠르스크로 진격했으며, 20일까지 93개 주거지역 영토를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뉴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가하게 텀블러를 세척하고, 밥을 먹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전쟁 중이었다. 인터넷을 켜서 SNS를 열었는데 거기서도 남자와 여자가 편을 가르고 싸우고 있었다. 어디에도 싸우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이상했다. 원래 이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서연이는 가끔 내게 말했다. 언니처럼 강한 정신력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내가 강한가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주변에 관심이 없던 것뿐이었다. 서연이는 예민한 아이였고. 나는 서연이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그녀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신경이 곤두섰다. 서연이가 했을법한 생각과 말들이 내 몸을 장악한 것 같다. 나는 온몸의 피가 차게 식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일기장을 다시 집어 들었다.


06년 5월의 너는 대기업 면접을 봤다. 합격을 했고, 6월에는 산업시설 견학을 다녀왔다. 유월말쯤엔 신체검사를 다녀왔고, 아르바이트비 모은 걸로 너는 치과를 다녀왔다. 치아점검을 받았고, 이때는 저혈압이 없었는지 헌혈을 자주 했다. 7월의 너는 조카를 만났고, 영화 괴물을 보았다. 첫사랑과 덤덤히 마주하고 놀았고, 태어나서 처음 막걸리를 마셔보았다. 너의 형부는 팔불출이었고, 너는 그런 언니의 가족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너는 분명 공포장르를 싫어했던 것 같은데 영화 유실물을 보았다고 되어있다. 대구에 한일극장이 아직 남아있을 때였고, 너는 거기를 자주 이용했다.


너는 첫사랑의 친구를 만났다. 그는 너에게 복잡한 존재였다. 흐지부지하던 첫사랑과 이별을 했고, 첫 조카의 돌잔치 때 너는 검은 정장을 입고 갔다고 평생 언니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아기들은 날 싫어한다고 적혀있다. 너도 아이를 싫어했다. 너는 영화 새벽의 저주를 봤다. 무섭다기보다 슬퍼했다. 일기장 제일 끝에는 너와 너희 어머니의 이름을 도배해 두었다. 너는 어머니를 사랑한 만큼 증오했구나 싶었다.


졸업하기 전에 이미 너는 취업을 나갔다. 아직도 네가 한 말이 생각난다.


"논밭만 있었어. 숨을 쉬는데 거름냄새가 너무 심해서 입안에 소똥이 씹히는 기분일정도로, 거기 허허벌판에 기숙사가 있었고, 나는 샴푸가 없어서 같은 호실을 쓰는 아이들 샴푸를 훔쳐 썼어."


빚으로 넘어갈뻔한 집에 너는 모든 돈을 보내어 살렸다. 그리고 점점 죽어갔었지. 첫 번째 일기장은 그렇게 닫았다. 다른 일기장을 꺼내어 보아야 했는데 조금 쉴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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