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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Aug 17. 2024

일기는 일기장에 #02



아직도 서연이가 곁을 떠난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름이 셋이었던 그녀라 그런지 마치 셋을 한 번에 잃은 기분이다. 셋 중 민서는 나와 가장 친하지 않은 서연이의 모습이다. 우리가 따로 지내던 시간이다. 제부가 오늘 민서를 내게 줬다.


"처형이 가져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글을 쓰시잖아요. 그가 덧붙였다. 내가 서연이를 글감으로 쓸 수 있을까 제부? 물었더니, 쓰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책으로 남겼으면 해서요. 솔직한 제부의 마음이었다. 나 글은 쓰지만 대단하진 않아. 그에게 POD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누구한테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도 못 들어가. 신청도 안돼. 독립출판이라도 차려야 하나? 아냐, 아냐, 글쓰기를 그렇게 하지 말자. 고개를 저었다. 제부 나 이거 못 가져가겠어. 일기장이 들어있리빙박스가 왔다 갔다 했다.


"제가 가지고 있으면 태울 것 같아요."


그가 최후통첩을 했다. 그는 바드러운 암벽 위에 앉아있는 얼굴이었다. 서연이네 집을 나오는 내 손에는 결국 박스가 들려있었다. 이팝나무가 끝물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밥알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더위가 성큼 가까워졌다. 지하철에 운 좋게 자리가 있어서 앉아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탔고, 군복 입은 남자아이 한 명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군인만 보면 짠한 나는 손을 그의 앞에 휘적휘적해 보이며 "여기 앉으세요." 했는데, 그가 팔짝 뛰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는 도리어 나와 멀어졌다. 뻘쭘해진 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군인 청년한테 앉으라 했는데 나쁜 짓한 것 같아. 하고 보냈다. 그는 답장으로 '민간인하고 얽혀서 좋을 일 없어서 그런 거니까 권유하지 마.' 머리로는 납득하면서 그래도 언젠가 단 한 명이라도 앉히고 말겠다는 이상한 고집이 생겼다.


꾸벅꾸벅 조는데 왼쪽의 노약자석 맞은편 휠체어칸 쪽이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조금 여유롭여서 그 사이로 보니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지하철에 오른 여자가 있었다. 젊은 여자가 그녀에게 욕설과 섞인 조롱을 했다.


"씨발, 사람 좀 없는 시간대에 가던가 소형차라도 몰던가 유모차를 갖고 지하철을 타네."


아이엄마는 표정만큼은 화가 났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서연이가 생각나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입을 열까, 말까, 손에서 덜그럭거리는 리빙박스가 마치 용기를 주는 것 같아서. 그런데 나도 너무 떨리고 겁나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저기요! 유모차에 아기 좀 태우고 지하철 탈 수도 있지 않나요?"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동조하자 욕설을 하던 여자도 나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바로 다음역에서 하차했다. 아이 어머니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눈빛으로 인사를 전했다.


리빙박스 안에 그 내용도 있을까? 은채가 딸, 서윤이를 데리고 미술관에 갔다가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서윤이가 그날 너무 힘들었는지 멀미를 해서 지하철 바닥에 구토를 했던 날. 통로를 지나가던 중학생이 여기를 이렇게 막고 서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냄새난다고 은채한테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은채, 그러니까 서연이는 그날도 내게 하소연을 하며 울었다. 나는 요즘 애들 무섭다. 고생했네. "서윤이는 좀 어때?"라고 물었는데 너는 도리어 차분해지더니 "응. 미안하지."라는 이상한 대답을 했다. 사실은 네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닐지도 몰라. 그 지하철에서 나처럼 소심하게 "저기요!"라고 하지 않고, 저렇게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들처럼 "애가 토 좀 할 수 있지! 안 치우는 것도 아니고 거 너무하네!" 하고 편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이미 늦었고 너는 세상에 없다는 것을 묵직한 리빙박스의 무게와, 덜그럭거리는 다이어리들, 편지더미들이 알려줬다. 


집에 도착한 나는 냄비에 물을 반 정도 넣고 바글바글 끓는 걸 보다가 식초 조금과 소금을 한 스푼 푹 떠서 넣었다. 달걀을 세 개 깨서 냄비 겉이 하얗게 변할 때쯤 국자로 수란을 건졌다. 냉장실에 요구르트와 냉동실에 다진 마늘 큐브를 꺼내서 스푼으로 으깨듯 섞었다. 팬을 달궈서 버터를 넣고 거품이 나면 불을 껐다가, 고춧가루와 소금 한 꼬집을 넣어서 고추기름을 만들었다. 아까 해둔 수란에 전부 붓고 있을 때쯤 남편이 도착했다. 어깨가 긴장되어 있다가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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