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막 커튼의 위력은 대단하다. 날이 밝았는데도 방 안에 있으면 그 빛을 전혀 알지 못한다. 겨울은 특히나 심하다. 창문을 굳게 닫고 방 안에 고요히 웅크리게 된다. 반면 여름은 어떠한가. 밤의 더위로 인해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잠이 든 덕분에 아침에 날 깨우는 건 새소리와 매미소리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그러나 한편으론 어찌나 고맙던지. 자동차 소리가 날 깨우는 게 아니라서 다행인 여름날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겠다고 다짐해놓고도 삼십 분이나 더 뒹군 건 그 탓이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 말이다. 좀 더 무기력해지고 희망은 조금 더 늦게 갖게 된다. 빛이 이토록 중요했었나.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웠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대개 그런 시기는 절망에 빠진 상태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밤에는 울어도 아침엔 힘이 샘솟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밤에도 울고 아침에도 무기력했다. 밤보다 아침이 더 무서웠다. 밤은 누가 웅크리건 그걸 다 포용해주는 시간 같았다면 아침은 웅크리는 사람을 눈에 돋보이도록 만드는 시간 같았다. 다들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아가는데 나만 웅크린 시간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침이 와서 미적거리는 나의 희망을 끌고 나오길 바란다.
“뭐하고 있어! 아침이잖아!” 소리쳐주길 바란다.
넷플릭스에서 <요괴 아파트의 우아한 일상>을 봤다. 요괴 사토는 인간인 유시에게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수명이 정해져 있잖아. 그 안에서 있는 힘껏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동경하게 된다니까.”
그 말을 듣고 유시는 자신은 그런 인간이 아니라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자 요괴 사토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변해 가면 되지. 분명 지금은 안 좋은 시대일 수 있지만 반드시 좋은 시기가 올 거야. 그리고 다음 시대를 만드는 건 너 같은 젊은이들이지. 그러니까 넌 미래를 바라봐.”
“그래 꿈을 가지는 거야. 정해진 시간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꿈을 정했으면 똑바로 돌진해야 돼. 그러기 위해 다소 탐욕스러워져도 별 수 없지. 왜냐면 그게 인간의 특권이잖아.”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가. 거기부터 목에 걸린다. 동물을 죽이고, 동물을 괴롭히고, 인간만 알고, 심지어 나만 아는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런 인간인 무기력하게 병들고 죽어가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이내 깨달았다. 나는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요괴 사토의 말처럼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 속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보면 어떨까. 아침이 올 때마다 그 속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해 보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에 힘들고 고달픈 시간은 거머리처럼 나를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자세는 어떨까. 하나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요괴 사토가 말한 것처럼 난 좌절하고 절망하더라도 그 안에서 ‘있는 힘껏’ 살아갈 것이다. 아프다 소리치고 매일 밤 울고 울어도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상의 <날개>에 ‘나’는 미스코시 옥상에 올라가 혼란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아내가 정말 나를 죽이려고 아달린을 먹인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아내의 말대로 밤에 계집질을 했나, 도둑질을 했던가. 그러다 정오 사이렌이 울리자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말소된 희망의 페이지를 다시 넘기며 날아보자고 다짐하는 ‘나’를 보며 요괴 사토의 말에 공감한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 그것은 변한다는 것에 있으며,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