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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an 06. 2021

짧은 시간, 짧은 풍경, 짧은 소망

그림일기: 눈이 온 날

'똑똑'

강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난 "물건 좀 가지러 왔습니다. 미안해요."라는 다음 말을 상상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눈 온다!!"


눈이야 올 수 있겠지, 날이 이렇게 추운데, 하고 생각하며 끊어진 수업을 다시 붙이기 바빴다. 그런데 퇴근할 때 창문을 내다보고 난 깜짝 놀랐다.


이거... 엄청난 눈이잖아.




집에 어떻게 가나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그보다 조금 더 큰 마음은 '와... 이렇게 눈을 보는 게 얼마만이야...' 하는 거였다. 학생들을 데리러 우산을 가지고 어머니들께서 학원으로 오셨고 거리엔 어린아이들이 눈 위에 발자국을 찍느라 분주했다. 자동차들은 걷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였으니 세상이 꼭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모든 게 느려진 세상.


그래서 내가 탄 버스도 느려졌다. 눈이 언제 내렸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버스 기사분이 하시는 말을 들으니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더라. 버스 기사분은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버스 출발하는데 6시에 갑자기 눈이 내리잖아. 그러니 배차 간격이 앞차랑 50분 벌어졌다니까." 그래서 내가 탄 버스에 사람이 많은 거였다. 코로나 19가 터지기 전 퇴근 7시대에 버스 풍경처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겨우 버스에 올라 타서일까. 난 버스에 타기만 하면 집에 쉽게 갈 줄 알았다. 뭘 모르는 소리였다. 지하철역에서 회차하는 버스가 다시 버스전용차로 들어가는 데엔 10분이나 걸렸고 그게 다시 종점까지 가는 데엔 총 1시간이 넘게 걸렸다. 평소엔 30분 안에 도착하는 데 말이다.


버스에 오래 있으면서 바깥 풍경을 보게 됐다. 오르막길이 아닌 데도 차들 중 몇몇은 가질 못하고 바퀴만 헛돌았다. 어떤 사람은 차에서 내려 염화칼슘을 뿌리는지 도로에 무엇을 뿌려댔고 어떤 사람들은 꽉 막힌 도로에 서서 자신의 차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여러 풍경들 중 내 마음에 와 닿은 풍경은

바퀴가 헛돌아 꼼짝 못 하는 차를 여러 사람이 모여 밀어주는 풍경이었다. 예전에 우리 집 앞으로 산사태가 나서 부서진 돌과 자갈들이 밀려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와 함께 엄청난 비도 내렸는데 종아리까진 아니더라도 발목 높이보단 더 높았다. 그때 집 앞을 치우자고 두 발 벗고 나선 건 엄마와 아빠였고 이웃 사람들도 그에 같이 힘을 보탰다. 어차피 자기 집 앞이니 자기가 치워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왜 인상 깊냐면...


초등학생 때만 해도 이웃과 음식을 나눠 먹고 이웃에게 집 열쇠를 맡기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이사 온 곳에선 그렇지 않았다. 건물에서 서로 마주쳐도 인사를 건넬까 말까였다. 그런 서먹서먹한 사이에 힘을 합쳐 돌덩이를 나르고 자갈과 모래를 쓸며 서로 빗물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사는 모습 같았다.


오늘도 그랬다.


핸드폰만 보고 서로를 보지 않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이 사람들이 오늘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이게 사는 모습 아닌가.


단시간 내에 많은 눈이 내렸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제대로 사는 모습을 보아 버렸다. 그리고 눈 덮인 하얀 거리를 보며 막연히 소원했다.


갑자기 내린 폭설처럼 우리도 일상을 되찾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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