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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un 22. 2021

말만 그럴까 다 그렇지

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


첫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잘해 주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솔직해도 좋은가. 잘해 주면 당연히 상대방이 좋아지지.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좋아하면서도 의심한다. 이건 단순한 호감일까, 예의일까. 그러면서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한다.



그 후로도 부반장 같은 사람들은 있었다. 웃어 주는 사람. 말 걸어 주는 사람. 아파서 엎드려 있을 때 손을 들어 선생님에게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려 준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 친구들이 나를 에워싸고 괴롭힐 때 괴롭히지 마,라고 말해 준 착한 사람. 나는 그들을 다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내게 상처를 줬다. 끝까지 웃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계속 말 걸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만날 때마다 친절한 사람도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밤 나는 일기장을 펼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나는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 속지 않겠다. 기억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바보 멍청이 이 똥 같은 놈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과거의 난 그랬다. 잘해 주기만 하면 돌멩이도 사랑하는 바보였지.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나'도 친절을 사랑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항상 친절하지 않았다.



학원에 남학생 한 명이 떠오른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문가가 아니라 모르지만 그는 보통의 학생과 달랐다. 인사를 건네면 애교를 부리느라 강아지 소리 '멍멍'을 내기도 하고, 드라마 일정을 줄줄이 외면서 원하는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말을 더듬고, 혀가 짧아 발음이 좋지 않고... 그런 그를 처음에 난 답답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제는 그런 그가 나에게 "선생님 핸드폰 기종이 뭐예요?"라고 묻는 것이다. 요새 그와 난 꽤 친해졌는데, 그래서 그가 쉽게 나에게 묻는 건가 보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귀찮아졌다.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는 그가 귀찮았고 답답했다. 페이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수업을 듣는 척하는 게 답답했다. 왜 저렇게 느릴까. 왜 제대로 따라올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그의 존재를 무시하며 시간을 보내왔던 터라 나의 답은 친절하지 않았다. "그런 거에 관심 갖지 말고 공부에 집중해~" 장난 식으로 진심을 말했는데 그가 불현듯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말은 저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지금 말투는 저를 무시하는 것 같은데." 아차, 싶었다. 난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상대의 존재를 존중해야 진짜 그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친절은 기본으로 업고 가고. 그런데 나는 그를 존중하지 않았던 거다. "아니야. 난 널 무시하지 않았어."라고 그의 착각인 양 이야기했지만,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되뇌었다.



하지만 아니잖아. 천천히 말해도 안 되잖아. 차분하게 말해도 어렵잖아. 떨려서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못 해서 떨리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눈물이 고이려 했다. 찡하게 모이는 눈물의 기운을 어금니를 꽉 깨물어 막아 냈다.

사람들은 줄줄 말을 참 잘해. 써도 써도 넘치는 말의 바다 같은 것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어. 플라스틱 수조 같은 곳에 한 모금 정도의 물만 바닥에 남아 있거든.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사람도 있어. 수조가 깨진 사람도 있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사람도 있어. 우리 친구는 말하는 게 왜 힘드니? 어떤 단어가 어렵고 어떤 상황이 두렵니? 걱정 마. 억지로 시키지 않아. 천천히 해 보자. 내가 도와줄게.



원장의 말에 '나'가 설득된 건 아니다. 눈물을 흘린 것도 아니다. 눈물이 흐르려 했을 뿐이다. 말이라고 하는 게 하기 힘든 것일 수 있다니. 하긴 숨을 쉬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건강하니까 아무렇지 않게 쉬는 숨이 건강을 잃었을 때 그렇지 않다고. 말도 그럴 것이다. 쉽게 나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법.

과거에 난 말이 잘 나오는 편이었나? 남들 앞에서 쑥스러워서 말을 잘 못 하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그건 병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이 부족한,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부끄러움을 타면서도 말을 한다.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경우가 있다 해도 말을 한다. 대개는 강사라는 직업에 의해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는 것이다. 말이라고 하는 건 잘 나올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어릴 때 발표하기를 어려워했기에, 혹은 속을 남에게 내보이는 게 어려웠기에 일기를 쓰고 낙서를 하며 속내를 드러냈는지 모르겠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천천히 나는 종이와 친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말을 하기가 어려울 때, 말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닐 때 나는 종이에 내 마음을 쓴다. 요즘은 핸드폰에 기록을 하고.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해진다. 내 말을 내가 들어주고 있고, 내 말을 내가 술술 하고 있는 형국이니까. 충분히 위로가 된다. 그것처럼 여기 '나'도 속마음을 노트에 적기 시작한다.



말하기 힘든 말.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적어.

원장은 내게 노트를 한 권 줬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처방전이 다가왔다.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북쪽 세계의 끝, 얼음의 나라가 있었어. 그곳은 녹지 않는 얼음산과 뾰족한 나무가 가득한 숲,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밭이 있는 차가운 겨울의 세계였지. 얼마나 추웠냐면 말을 하면 말조차 얼어붙을 정도였어. 사람들이 말을 하면 눈앞에서 말이 얼음덩어리가 되어 후드득 떨어졌단다. 그러던 어느 날 모래의 나라에서 전령이 찾아왔어. 평생 태양과 모래바람에 익숙했던 정령은 추위와 얼음의 풍경에 졸도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지. 얼음 왕궁에 도착해 모래의 왕이 보낸 편지를 건넬 때도 손과 발을 덜덜 떨었단다. 얼음의 왕은 독특한 방식으로 답장을 전했어. 허공을 향해 직접 말을 한 거야. 전령은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지. 왕이 말할 때마다 얼음이 한 덩어리씩 바닥에 떨어졌거든. 왕은 그것들을 모아 비단에 담아 전령에게 전했어. 전령은 보자기를 껴안고 얼음이 뒤덮인 눈밭을 지나가다 추위에 보자기를 떨어뜨리고 말았어. 얼음은 깨졌고 보자기는 풀리고 말았지. 당황한 전령은 바닥에 떨어진 얼음조각을 모아 보자기에 담았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숨이 차도 뛰고 또 뛰어야 했지. 드디어 눈보라가 그치고 하늘에 태양이, 눈앞엔 모래가 나타났어. 모래의 나라에 돌아온 거야. 전령은 모래의 왕 앞에서 보자기를 열었어. 그것이 무엇이냐는 왕의 질문에 얼음의 나라에서 보낸 편지입니다,라고 답했지. 그리고 전령은 얼음을 뜨거운 물이 담긴 통에 집어넣었어. 왕을 포함한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지. 왜 그랬을까?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을 받아 나는 당황했다. 처방전은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라는 듯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야. 도저히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는 무서운 괴물의 울음 같은 소리만 들렸지. 얼음이 깨지면서 얼음의 왕의 말도 다 깨져 버린 거야. 그런데 굉음 사이사이로 온전한 말이 한마디씩 들렸는데 그게 뭐였게?

나는 모르겠다는 눈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처방전은 추운 척 몸을 웅크리고 떨며 말했다.

아, 추워. 아, 추워. 그건 전령의 혼잣말 얼음이었단다.

나는 겉으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가 좋았다. 뜨거운 물에 녹아 되살아나는 말이 신비롭고 재밌었다. 처방전은 노트의 하얀 면에 손가락으로 얼음,이라고 투명한 글자를 썼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노트는 얼린 말을 담는 보자기 같은 거야. 어려운 말이 있거나 자꾸 깨지는 단어가 있으면 여기에 빠짐없이 적어. 그리고 틈날 때마다 연습하고 또 연습해 보는 거야. 노트에 적은 것은 절대 깨지지 않거든.



원장은 깨지는 말들, 즉 말하기 힘든 것들을 적으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속마음은 여기에 다 적으라며 노트를 건넨다. 난 그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을 글로 적는다는 건 내 마음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고, 그 안에 해결 방법이 있으니까. 이름 대신 트라우마로 가득한 단어를 이름으로 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난 트라우마까진 아니지만 남이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싶어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그걸 입 밖에 내뱉는 순간, 그건 그럴 일이 아니었다. 별일이 아니었는데,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음으로써 그 일이 거대한 양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야기해야 할 상황이면,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하는 상황... 물러날 수 없을 때 솔직하게 '나'라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자 마음먹는다. 트라우마로 가득한 말들을 이름으로 삼는 것도 그런 것일 거다. 자주 들으면 그게 별거 아니게 되는 것처럼 싫은 말들을 이름으로 듣기 시작하면 별게 아닌 단어로 들리는.



사람들은 이상하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은 할 말도 없는 줄 안다. 표현을 안 하거나 어리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생각도 없고 아이큐도 낮다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옆에 있든, 듣고 있든, 상관하지 않는다. 선생도 날 못 보고 친구들도 날 못 본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표현이 중요한 것은 그래서일 거다. 표현하지 않으면 남에게 '나'가 전해지지 않고, 그래서 남에게 무시당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말을 더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말이 적어도, 표현이 적어도 그런 일들은 왕왕 벌어진다. 내가 당신 곁에 있다는 것,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표현해야 한다. 말이든 글이든 무엇으로든. 남에게 가닿을 방법은 그것뿐이다. 나 역시도 그걸 몰라 한참 헤맸다...



너 글 잘 쓴다. 글쓰기 글쓰기는 말하기와 닮았어. 문장 하나를 정확하게 쓰는 건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제대로 제대로 제대로 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거든. 알겠지만 말을 더듬는 사람은 말을 말을 말을 입 밖에 꺼내기 전에 이미 그 말을 더듬을 것을 예감하고 있어. 실패할지 몰라,라는 막연한 예감이 아니라 이미, 이미 실패한 상태로 말이 입속에 들어가 있지. 그러니까 예감이면서 예감이면서 동시에 확신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갖고 갖고 갖고 있는 예지력이랄까.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예감이면서 확신이라고 하는데, 어디 말뿐이겠나.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이 책에서는 계속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이것도 그럴 거다. 예감이고 확신인 것을 잘 한다는 예감으로, 확신으로 고치면 되는 일인지도. 그걸 잘한다는 예감과 확신으로 바꾸려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공한 경험을 늘리고 가슴에 뿌듯함을 싣고.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희망을 주고 싶다. 아무리 나쁜 예감이 들어도 잘해 낼 수 있다는 희망.



헤어지기 전 선행상이 말했다.

그런데 너 진짜 말 잘한다. 너처럼 말 잘하는 사람 처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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