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걷다 1 15화

인디언 가든, 우리에겐 파라다이스

넓고 깊은 협곡을 걷다 #6

by 메이플


Wildness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황야’와 ‘광야’였다. '황야'라는 말은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고, '광야'는 육사의 시에 등장하는 넓고 텅 비어 있는 만주의 벌판 아니면 성경에서 세례 요한이 살던 곳이나 예수님이 시험받던 장소가 떠오른다. 그래서 '광야'는 wildness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딱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내지 못하겠다.


북미에서 wildness라는 말은 '야생'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곳. 전기, 수도를 비롯하여 인위적으로 지어진 것이 없는 공간. 문명의 편리함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곳 말이다.


평소에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고 사는지 잘 느끼지 못하는데 wildness에 있게 되면 평소에 누리고 사는 것들에 감사하게 된다. 틀면 바로 나오는 물과 에어컨이 나오는 건물까지는 바라지 않더라고 햇볕을 가려주는 지붕도 한없이 그리워진다.


처음에는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도 없고 물조차 구하기 힘든 이런 곳에 있는 것이 한없이 불편했지만,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해서 살게 되는가 보다. 트레킹 사흘째가 되자, 이런 환경에서 지내는 일이 조금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솔트 크릭 캠프사이트에서 셋째 날을 맞이하여 간편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재빨리 텐트를 걷고 배낭을 꾸렸다. 가야 할 목적지인 인디언 가든 캠프그라운드 Indian Garden Campground까지는 7.3마일로 짧지 않은 거리였다. 더위가 꼭짓점으로 치솟는 한낮에 걷지 않으려면 오전에 부지런히 길을 줄여놓아야 한다는 걸 지난 이틀의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했다.


계곡 아래로 굽이굽이 흐르는 콜로라도 강은 아침 햇살에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니 저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일에서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가기도 힘들고, 내려간다 해도 콜로라도 강물은 마실 수 없다. 강물에 유해한 성분이 많아서 마시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멀리 보이는 강물은 갈증을 일으켰다.


트레일은 콜로라도 강과 평행으로 가고 있지만, 직선으로 뻗어있지 않았다. 지형에 따라 계곡을 만나면 길은 안쪽으로 굽어 들었다가 다시 돌아 나오는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졌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트레일을 걷다 보면, 생각들이 사라지고 그냥 한발 한발 내딛는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오전이라 오후에 비해 좀 덜 더울 뿐, 여전히 햇살은 뜨겁고 달구어진 공기는 모든 물기를 말려버리고 있었다. 햇볕 아래에서 걷다가 바위 아래이건 나무 아래이건 그늘이 있으면 그 좁은 그늘 속에 옹기종기 들어가 잠시 햇볕을 피하며 더위를 식히고 또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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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톤토 트레일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이제는 남쪽을 향해 가야 했다. 지금까지 걷던 좁은 트레일과 달리 트레일도 넓고 먼지도 많이 날리는 길이었다. 사우스 림에서 노스 림까지 종단할 때 이용하는 트레일이기도 하고 사우스 림에서 내려오는 사람도 많아서인지 트레커를 자주 마주쳤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을 본 게 이틀만이었다.


끝이 보인다 싶으면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까지 가기가 지루하게 느껴진다. 멀리서 황량한 협곡을 지나오는 동안에 본 적이 없는 큰 숲이 보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숲이 있다는 것은 물이 있다는 말일 테고 캠프 그라운드도 저기임에 분명했다.


드디어 숲으로 접어들고 얼마 가지 않아서 조그만 시냇물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캠프 그라운드에 곧 닿을 테지만 시냇물을 지나칠 수 없었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던지고 겨우 발만 잠기는 그 시냇물에 발을 담갔다. 그 찬 시냇물에 발을 담그던 그때가 트레킹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세족으로 더위를 식히고 캠프그라운드로 올라갔다. 캠프그라운드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텐트 패드를 갖춘 캠프사이트도 많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도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고 화장실과 수도도 있었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텐트 패드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다음 날 빨리 출발하기 위해 사우스 림으로 가는 트레일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치고 식사 준비를 했다.


첫날 모뉴먼트 크릭 캠프 사이트에서 먹은 저녁 말고는 다른 끼니는 거의 간편식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남아 있던 쌀로 넉넉하게 밥을 했는데, 밥을 먹고도 채워지지 않은 허기에 남아 있던 라면도 모두 끓여 먹었다. 더위에 지쳐 잘 먹지 못하다가 그나마 밥 다운 끼니를 먹느라 두 끼분 식량을 탕진했다.


오후 햇살은 또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늘이 없어 뜨거워진 캠핑장을 피해서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제법 큰 시냇가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오후의 햇살을 피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아이들은 들어가서 물장구를 칠 수 있는 깊이였지만, 어른들에게는 그리 깊지 않았다. 시내가 제법 큰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곳의 물가에 자리를 잡은 물에 발을 담그고,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만 묵다 가는 사람들인지 가벼운 차림으로 트레킹을 가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우리는 너무 충분히 걸었기에 근처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한가로운 사람들 속에 섞여 앉아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하는 일 없이 노닥거리는 오후의 한때를 보냈다. 햇볕에 달아올라 뜨겁던 얼굴과 머리가 천천히 식고 속에서 말라버린 습기들이 다시 차 오르며 갈증도 서서히 물러갔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랜드 캐넌#트레킹#솔트 크릭 캠프사이트#인디언 가든 캠프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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