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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방인2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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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구년생곰작가 Sep 27. 2024

찢어진 운동화






비 내리는 오후, 나는 성민이 어머니의 집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잿빛 물감이 번지듯 내리는 비는 나의 마음처럼 무겁고 지루하게 내려앉았다. 손에 꼭 쥔 서류봉투는 점점 축축해졌고, 그 속에는 성민이의 죽음과 관련된 수많은 증거들이 담겨 있었다. 노동철 변호사와 함께 모은 자료들. 고소장을 제출하기 직전까지 준비를 마쳤지만, 나는 이제야 갈등에 빠졌다.



성민이의 어머니를 다시 만나러 간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전에 근로복지공단에 재해 신청을 다시 했을 때, 그들은 사고 당시 성민이의 과실로 보고 승인해주지 않았다. 낙담했지만 우리는 형사고소 준비를 계속했다. 그러나 성민이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어머니는 5천만 원이라는 돈으로 회사와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 사건을 더 이상 공론화하거나 법정에서 다투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성민이 죽고 나서 이제는 자식이라고는 성규 하나밖에 없어요." 

"없는 살림에 이제 그만 마음을 내려놓고 살고 싶어요. 그 돈으로 시장 자판이라도 펴고, 이제 하나 남은 내 자식이라도 지켜야죠."



어머니는 거칠어진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피로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애써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노동철 변호사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당연했고, 어쩌면 나도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민이의 죽음, 그 참혹한 사고를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어떻게 그 사건을 이렇게 쉽게 묻을 수 있을까? 성민이의 억울함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올바른 걸까?



집을 나서며 나는 문득 신발장에 놓인 낡은 운동화에 눈길이 갔다. 그건 사고 당시 성민이가 신고 있던 운동화였다. 가죽은 찢어져 나가고, 흙먼지가 켜켜이 쌓인 운동화는 여전히 어머니의 신발장 한편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버리지 않았다. 그 운동화가 이제 성민이를 기억하는 마지막 물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성민이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운동화를 바라보며 가슴이 아리고 쓰라렸다.



성민이의 죽음이 단순한 근로자 과실로 인한 사고로 치부되고, 회사와의 싸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의금을 받았던 어머니를 보며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하려는 일이 과연 맞는 걸까?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과연 이 싸움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싸우고 있는 것은 성민이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나 자신의 정의감 때문일까?"



혼자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내게 말했다. 



"성민이가 네 오래된 친구라 고맙다만, 이제 너도 그만 마음을 놓고 살았으면 좋겠어. 회사 같은 큰 조직을 상대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니? 그만 마음을 정리하고, 나처럼 네 삶을 살아가야지."



그 말은 깊게 파고들었다. 나 역시 지쳤다는 걸 느꼈다. 성민이의 죽음 이후, 나는 이 사건에 몰두하며 다른 것들은 모두 잊고 있었다. 친구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의지는 점차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민이 어머니의 집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운동화를 바라봤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 운동화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성민이가 그날의 사고에서 도망치지 못한 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의 사건은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의 말처럼 회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혹은 이 사건을 계속 파헤치는 것이 그저 성민이의 가족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하는 일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운동화의 찢어진 가죽과 헐어진 밑창은 나를 붙잡고 있었다. 성민이의 마지막 순간이 그 속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어머니가 사건을 묻고 싶어도, 성민이의 억울함을 묵과할 수 없다는 마음이 내 안에서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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