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 후, 나는 멀리서 올라온 부모님과 며칠을 함께 보냈다. 사고 소식을 들은 과장님은 내가 퇴사하기 전 흔쾌히 병가를 내주셨고, 덕분에 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유롭게 쉴 수 있었다. 사실 과장님이 병가를 허락한 건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탓도 있었다. 회사는 요즘 노조 및 내부 고발자들에게 부당한 인사조치나 퇴사 압박을 주고 있었으며, 심지어 경영진이 노조 관계자를 대상으로 청부살인을 계획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까지 떠돌고 있었다. 소문이 날 정도로 직원들 사이에서 회사에 대한 신뢰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박태일 지부장과 나의 사고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공통점이 있었기에 이러한 소문은 더욱 퍼져 나갔다.
며칠 후, 나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회사 짐을 챙기고 동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고생 많았어, 멀리서 와서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자."
"진짜 나는 그런 용기를 처음 봐서 덕분에 정말 고마워 나도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어."
"자네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회사 내에서 그저 그런 소모품으로 쓰다가 버려질 운명이었을 거야. 알면서도 모두들 무섭고 두려워서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어른들이 정말 미안하네."
"앞으로 많이 응원할게."
사람들은 저마다 나에게 응원과 위로의 한마디를 해주며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내가 처음 발령받았던 반도체 생산부와 자재부에도 인사를 드리고 회사를 나서려는 찰나에 헤어졌던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오랜만이네, 이야기 다 들었어."
"몸은 좀 어때.?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난 너를 정말 이해하지 못했어. 그저 철부지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너로 인해 내가 많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응원할게."
그녀는 나와 간단하게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뒤돌아 사무실로 향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슬픔에 흐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나도 그녀도 서로의 안녕을 기도할 뿐이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뒤, 나는 박태일 지부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았다. 박태일 지부장은 많이 회복되어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전실된 상태였다. 입원병실에는 노동조합 소속 간부들과 노동철 변호사가 있었다. 나는 한 명 한 명 뜨겁게 포옹하였고, 노동철 변호사와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서 싸움도 이제 마지막일 것 같네."
"자네가 여기 남아서 끝까지 싸워졌으면 했는데, 그 이상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 이제는 이 복잡한 문제들을 어른들에게 맡기세."
그들은 이제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아 보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함께 계속 싸우면 좋겠는데, 이제는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나는 조합 직원들과 노동철 변호사와 인사를 나누었고, 고단한 몸을 맡기고 조용히 잠들어있던 박태일 지부장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불의에 맞설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훗날 더 높은 곳에서 만나길 고대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정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이제부터 노동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나는 박태일 지부장에게 마지막 감사인사를 전한 뒤 병실을 나왔다.
아버지의 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하는 길, 고속도로 밖으로 공장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공장에 들어왔을 때,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던 그곳은 이제 내 기억 속에서 떠나야 할 공간이 되었다. 높은 담장과 감시용 CCTV,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들은 더 이상 내 인생의 일부가 아니었다. 공장 밖에는 여전히 천막이 쳐져 있었고, 곳곳에 임금체불을 항의하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다.
"꼭 이기세요. 당신들과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차 안에서 곧 잠이 들었다. 붉은 노을이 지는 하늘이 마치 신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 같았다. 옆자리에서 어머니는 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