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동안 준비하고 마침내 재판을 마쳤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회사 내 차가운 시선들뿐이었다. 어차피 퇴사할 예정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부서 관리자들과 이사들, 그리고 회장의 무서운 눈초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 내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언론은 나를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을 재조명한 혁신적인 인물로 칭송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은 거셌다.
"어디서 나타난 개뼈다귀가."
"지가 뭐라고 나라 경제를 이끄는 회사를 무너뜨리려 하다니."
"애송이가 사회를 망치려고 하는구나."
"애송이 주제에 누구를 욕하고 다녀.?"
"새로운 노동조합과 사회적 역할 좋아하시네."
"세상 말세로구먼. 어디서 어린 빨갱이가 설치고 다녀.?"
"저 새끼 간첩 아니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나를 향한 비난과 욕설이 넘쳐났다. 하루아침에 나는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 되었고, 가족까지도 그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 생각보다 노동조합에 속한 직원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정말 고생 많았네."
"자네가 우리 대신해 해준 일이 너무 고맙네."
"이제는 새로운 지부장이 되어 보는 게 어떻겠나?"
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거절하며, 앞으로의 길에 대해 고민했다. 최종 판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나는 회사에서도, 노동조합에서도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회사는 이미 내 사직서를 수리한 상태였다.
그날, 부서 과장은 나를 사내 카페로 불렀다.
"오랜만이네. 결국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 말았구먼."
"죄송합니다, 과장님."
"괜찮네. 자네 사직서는 처리됐고, 이달 안에 짐 정리만 하면 될 거야. 고생 많았네. 앞으로 뭐든 잘 되길 바라네."
과장님과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집으로 향했다.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가는 길에 뭔가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지, " 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현관 앞에 도착해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뒷머리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바닥으로 쓰러졌고,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필사적으로 나를 공격한 사람의 인상착의를 기억하려 애썼다. 검은 모자, 안경, 그리고 새하얀 피부. 그 얼굴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끊임없이 울리는 기계음, 앰뷸런스 소리,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응급실에 있었다. 이웃 주민의 신고가 아니었다면 더 큰일이 날 뻔했다. 상대는 나를 겁주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숙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심각한 두부 외상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뇌진탕 증세와 함께 두피가 찢어져 많은 피를 흘렸다.
눈을 뜨자마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전날 사고를 당한 후 의식을 잃었던 나는 그제야 회복 후 눈을 뜬 것이다. 부모님은 뜬 눈으로 전날부터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낸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자칫 큰 뇌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X-RAY와 CT 검사를 보니 골절이나 출혈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심각한 뇌손상은 없었지만, 뇌진탕 증상이 2-3주 정도 갈 겁니다. 다만 피를 많이 흘려 찢어진 부위는 봉합하였습니다. 퇴원 후에도 어지럼증이 있으면 병원을 방문해 주세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연신 고마움을 표하셨고,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여행 간다고 했으면 여행을 갔어야지. 이렇게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뭘 하려고 했냐?"
"네놈이 우리 가족들이랑 연을 끊으려고 한 거냐.? 연락이 끊긴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었건만. 연락을 받기는커녕 네놈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다니."
"아버지를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만류하며 나에게 말했다.
"아니, 여보. 아이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지, 뭘 더 바랍니까? 고마워 아들, 이렇게 무사히 우리 앞에 나타나줘서."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듯한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내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걱정을 끼쳤는지 새삼 느껴졌다. 그때 경찰이 찾아왔다. 간단한 인적사항과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물었고, 나는 기억나는 범인의 모습에 대해 설명했다.
"생각나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저희도 범인을 찾고 있습니다."
"네, 꼭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경찰들이 돌아가고 밤이 깊어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고단한 몸을 침대에 맡겼다. 그렇게 나는 험난했던 여정 중 다시 만난 가족의 품에서 오랜만에 깊은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