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의 자리
그 시절 나는 추리소설에 빠져있었다. 괴로운 회사 생활과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추리소설만이 유일한 한 줄기 빛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연달아 4-5개 보며 그의 작품에 어쩐지 허무함? 허탈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때쯤이었다. 무심코 클릭해서 본 다음카페 인기글에서 이 책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어야 하는‘ 책으로 소개했다. 추리소설을 소개하는 멘트로 그게 얼마나 간결하고 강력했던지. 나는 타이밍 좋게 책을 사주겠다는 회사의 말에 바로 홍학의 자리를 신청했다.
책장을 열고 다시 덮을 때까지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 내가 썼어야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 웃기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망했다.‘, ’선수를 뺏겼다.‘ 같은 우스운 생각을 했다.
영영 내 머릿속에만 있었을 뻔한 이야기를 남의 소설로 접한다는 건 충격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또 존재했구나. 진짜 내가 죽기 전에 꼭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잘 써놨을 줄이야.
내 머릿속에만 있을 뻔했던 포인트를 작가가 알려줄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 또한 충격이었다. 내가 이걸 못 알아채다니.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한편, 작가의 장치들이 견고하게 짜여진 앞부분을 다시 들춰내 읽으며 짜릿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썼구나. 그래서! 와하하!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길 잘했다, 진짜.
이 책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한솔, 해리, 아름, 정표, 부해에게까지 돌아갔다 왔고, 책이 돌아다니는 새를 참지 못한 주선, 성실, 소미는 이북으로 읽었다.
처음 이 책을 다 읽었을 때의 짜릿함을 다시는 느낄 수 없기에 이제는 다른 친구 A에게 주었지만, 도파민 급속충전이 필요한 이들의 일상에 성능 좋은 충전기였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보세요.
홍학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