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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임스 May 13. 2021

불판 닦다 토분 닦는 사연

식물집사의 시작, 맥락없이 우연하고 뜬금없이 화려하게

 고깃집 알바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불판 닦기.


시급이 비싼 데는 이유가 있는 법. 쉽지 않다. 잘 불려야 하고 긁히지 않게 조심히 닦아야 한다. 불판 세척의 완성은 맨손으로 전체를 스캔하는 일. 날카로운 부분을 조심하며 혹시 모를 이물질을 찾아본다. 실컷 구운 금빛 삼겹살에 오점을 남길 순 없는 법. 나의 고집은 깔끔한 맛을 얻고 매끈한 손을 잃었다. 나는 불판에도 이렇게 신경 썼다. 쉽게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나는 잘 한다고 믿었고 내가 정답이라 확신했다. '손님들이 좋아할 거야!' 이 고집은 '눈에 보이는 일만 했다는 점'이라는 실패의 이유를 만들었다.


불판을 닦는데 시간을 너무 썼다. 마감시간에 설거지 말고 해야 할 것이 많은데 나는 불판 사이 때만 보고 있었다. 애벌 설거지를 하고 베이킹소다 탄 물에 밤새 불려 다음날 해도 되는 것을, 당장에 해치우고 싶은 마음과 꼼꼼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감시간의 바쁜 가게에 다른 일을 놓친 것이다. 설거지에 이미 지쳐 있는데 바닥이며 화장실이며 눈에 들어왔을까? 게다가 '엄마가 하겠지'라는 불효막심한 회피는 통깨처럼 게으름에 뿌려졌다.


가게를 폐업하기 몇 달 전, 그때야 보였다. 나는 고집을 피우고 있었구나. 늦은 시간, 모두가 지친 그때 '지금 해야 속이 시원해!'라며 생떼를 부렸구나. 일을 해야 하는데 일하는 척밖에 되지 않았구나. 게으른 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근무자들의 피로는 불친절한 응대로 이어졌다. 반성은 늦었고 가족 간의 마음도 멀어졌다.


이처럼 가게가 난파될 때, 여자친구는 꽃집을 차렸다.


장사도 안되고 마음도 싱숭생숭한 상황, 가게를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드라이브 삼아 따라갔다. 가게를 벗어나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가게 CCTV를 수시로 확인한다. 멀어서 가지도 못하는데 바쁘면 당장이라도 갈 것처럼 손에 꽉 쥐고 본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CCTV 어플을 지웠다. 그리고 찬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비우려 애썼다. 애써 비운 마음에 금세 차오르는 생각. 난파된 가게와 멀어진 가족을 구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1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산의 한 농장. 그녀와 함께 간 곳은 신세계였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화려했다. 꽃과 식물에 우아한 화분도 가득했다. 턱이 목젖을 때린다. 촌티 내며 둘러봤다. '이거 뭐야?, 하찮게 생겼는데 왜 끌리는 거야?' 별천지에 눈이 뒤집힌 나는 새로운 세상에 빠졌다.


갑자기 뜬금없이 그리고 맥락 없이!

엄마의 베란다, 다육이가 나무처럼 큰다.

다육이가 베란다의 완성인 줄 알았던 내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애니시다의 레몬 향내부터 호접난과 몬스테라의 자태, 아름다운 토분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식물 살래!"

흥분한 나에게 차분하게 답하는 그녀.

"알았어. 사줄게, 뭐 갖고 싶어? 흥분하지 말고 작은 거 요거 사고 가자?"

투쟁과 생떼 (진상짓)를 통해 외목대의 대품 애니시다를 허락 맡았다.

뜬금없이 맥락 없이 나는 끌림에 결정했다.

뭘까? 이 편안함, 설렘, 따뜻함. 좋다. 좋아... 이유 없이 그냥 좋다.

표현하기 힘든 이 마음에 사람들이 식물을 사는 걸까? 고민도 걱정도 없어졌다. 애니시다의 레몬향과 멀리 바람 타고 온 로즈마리 향에 눈이 감겼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에게 말했다.


"나 식물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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