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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un 10. 2020

강렬한 일품음식, 국밥 한 그릇

달래 가며 삼키듯이 먹는, 눈물겨운 그리고 고마운 음식

무엇보다 밥을 국에 말아서 먹는 일체의 행위를 모두 ‘국밥’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국밥의 범위와 응용성이 무궁무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국밥은 육수에 고기와 채소 그리고 갖은양념을 넣고 펄펄 끓인 국에 토렴한 밥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밥알에 국물의 맛이 충분히 배어나고 국물도 뜨끈해야 한다. 또한 국밥 위에는 삶은 고기와 채소가 고명으로 쌓여 있어, 한 그릇 국밥만으로도 완전성을 추구해야 한다. 반찬도 김치나 깍두기 정도에 그쳐야 한다. 그래서 국이 반찬 중의 하나로 식사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국이 식사의 중심적 위치를 점하는, 즉 국밥 한 그릇만으로 온전한 음식세계를 이루어야 한다.


‘말아 먹다’라는 동사의 부정적인 사용으로 인해, 한 그릇 국밥의 완전성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일을 망치는 행위를 뜻하는 동사 ‘말아먹다’를 국밥에 빗대어 사용하면서, 무언가를 망친 사람에게 ‘국밥 배우’ 혹은 ‘국밥집 차렸나’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국밥은 그런 레벨의 음식이 아니다. 사실 국밥은 천만 영화 <변호인>의 포스터에 돼지국밥으로 등장하였으며, ‘정치인 먹방의 정수’라 불리는 ‘OOO은 배고픕니다’라는 대선 포스터에도 등장한 바 있다.  


더욱이 국밥은 한식을 가르는 양대 문파 중 한 곳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한식은 크게 ‘한상차림’과 ‘일품음식’ – 전문가적 소견이 아님을 미리 알려드린다 –으로 나뉜다.


호화롭든 소박하든 ‘한상차림’의 밥상은 긴 호흡의 향연이다. 탕이든 국이든 국물요리가 밥과 함께 내 앞에 놓여 있고 육고기나 생선으로 만든 요리가 밥상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으면, 그 옆으로 나물무침과 몇 장의 전 혹은 부침개 그리고 간장이나 새우젓이 담긴 종지가 배치되고, 반대편에는 배추김치와 무김치 혹은 물김치가 든든하게 놓인다. 막 무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채까지 올라오면 더욱 좋다. 독상이든 겸상이든 혹은 여럿이 둘러앉든 한상차림은 풍요로움과 너그러움 그리고 평화를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상차림 밥상 앞에서 긴 이야기와 활짝 핀 웃음을 나누고, 한상차림을 물린 후에도 긴 시간의 여운을 즐긴다.


반면 ‘일품음식’은 짧은 휴식이다. 마치 길 위의 휴식처럼 허기를 달래고 나면, 사람들은 가던 길을 다시 가거나 혹은 길을 바꿔서 다른 길을 간다. 그들은 한 그릇의 일품음식을 비운 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하루의 일에 힘차게든 힘겹게든 다시 뛰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일품음식의 느낌은 밋밋한 듯 하지만 사실은 강렬하다. 단언컨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일품음식은 국밥 한 그릇이다.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최영미 ‘혼자라는 건’ 중에서>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어진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거룩한 식사’ 중에서>


맞다. 국밥은 달래가며 삼키듯이 먹는 눈물겨운 음식이다. 또한 혼자서도 고개를 숙이고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는 고마운 음식이다. 대수롭진 않지만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위해 늦은 시간에 혼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방문했을 때다. 이제는 익숙하고 편안하지만 그때는 처음 오는 곳이고 시간이 없어 퇴근하고 간신히 들른 상황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 집을 옮길땐  문제로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많이 늦은 저녁밥을 먹기 위해 둘러보니 순댓국집 하나가 아직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가 보니 손님들은 모두 동네 사람인  서로 아는 눈치였고 주인장은 초면인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주인장이 가리키는, 출입문 쪽의 작은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천정 한쪽 구석에 매달려 있는 TV에서는 저녁 뉴스가 다음날 날씨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순댓국밥  그릇이  앞에 놓였다.


이 집은 다진양념이 따로 나왔다. 그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순댓국밥에 다진양념을 뻘겋게 풀지 않는다. 대신 펄펄 끓는 순댓국밥에 잘게 썬 청양고추와 들깨가루를 듬뿍 넣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어 삼키듯 먹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는 복잡하고 몸은 힘들었다. 그날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설고 어두운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순댓국밥 한 그릇을 비운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그 국밥집은 우리 가족의 단골집이다. 주인장은 다른 손님이 없을 때면 자기 가족이 먹으려고 담근 파김치나 열무김치를 따로 내주기도 한다.


사실 내가 국밥을 좋아하게  계기는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다. 대개의 경우 국밥은 소소한 상황에서 내게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가족에게는 국밥과 관련된 리츄얼이 하나 있다. 우리  아이들 둘은 모두 초등학생  성당에서 복사 생활을 했는데, 특히 토요일이나 일요일 새벽에 복사를 서는 경우 미사를 마친  우리 가족은 반드시 국밥을 먹으러 갔다. 주로 순댓국이나 해장국이었다. 새벽미사가 끝난 이른 휴일 아침에  가족이 24시간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잠이 드는,  평화롭고 행복한 리츄얼을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은  좋아했다. 아이들이 성장한 지금도 우리 가족은 ‘새벽미사  국밥 조찬행사 가끔 가진다. 나는 순례와도 같은  아름다운 행사를 참으로 좋아한다.


전주 남부시장 콩나물국밥, 부산역 앞 초량시장 돼지국밥, 지하철 5호선 오목교역 뼈다귀 해장국, 이문동 설렁탕과 미국 뉴저지에서 먹었던 설렁탕, 광주 소머리국밥, 고추기름을 넣어 먹는 용문동 선지 해장국, 청진동 해장국, 종로 어딘가에서 먹었던 돼지 내장과 부속이 잔뜩 든 국밥,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순댓국과 한우 전통 국밥 그리고 가난한 어린 시절 먹었던 시락국밥과 김치국밥.


매일 허기와 미각의 욕망을 달래기 위해 뭘 먹을까 하는 음식에 대한 결정의 80%는 주거지에서 10km 이내의 작은 반경에서 이루어지며, 이를 ‘음식반경’이라 부른다고 한다. 언제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나의 음식반경’ 안에는 반드시 국밥집이 들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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