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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un 15. 2020

퇴근길에 인왕산에 가야 하는 이유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퇴근 후 동료들과 인왕산에 오른다. 인권위에서 남산이 더 가깝지만 등산하는 맛을 느끼려면 인왕산이 제격이다. 언제든 “가볍게 인왕산이나 갈까?”하면, 덥다, 춥다, 힘들다 이런 군말 없이 따라나서는 다정한 동료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사무실 벽시계가 오후 6시를 가리키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텀블러에 물을 가득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요가 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평일 저녁 도심을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자유인이 된 기분이다.


최근 ‘힙지로’ 인기가 급상승 중인 을지로 일대는 퇴근 무렵이면 젊은 직장인들로 가득하다. 노동으로 딱딱해진 몸과 마음을 어떻게든 풀어 주어야 하는 시간이다.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 사직공원을 거쳐 인왕산 탐방로로 접어들면 공기가 확연히 순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여름밤의 산행은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아스팔트 길 만 벗어나도 온도는 금세 몇 도나 떨어지고, 탐방로 안쪽 숲으로 들어가자마자 달궈진 뺨과 이마에 닿는 선선한 바람의 촉각은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초록 이끼로 덮인 오래된 나무숲, 이름 모른 벌레와 숨어서 노래하는 새들,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 등장하는 노란 불을 밝힌 서울 성곽 길, 소인국처럼 작아진 산 아래 서울, 청회색 하늘이 조금씩 홍시 색으로 물드는 광경 앞에서, 마치 엘리스처럼, 아스팔트 위 이상한 구멍으로 빨려 들어와 낯선 세계로 넘어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 마법이 아니라면 몇 시간 전까지 조사보고서 더미에 파묻혀 있었던 나란 존재가 어쩌면 이렇게 까마득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딱딱했던 몸과 마음이 이처럼 마냥 한들한들해질 수 있을까?


인왕산 정상에서 저녁으로 준비해 간 김밥을 먹으며 사이다도 한 모금 마신다. 홍시처럼 익어가던 하늘이 어느덧 잿빛으로 어두워진다. 어둠이 내려앉자 도시가 불빛으로 다시 살아난다. 숨 막힐 듯 빽빽하게 자리 잡은 집들과 빌딩들은 낮의 사나움을 버리고 착해진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심이 온화해 보이는 건 내 몸과 마음이 조금 순해졌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저 불빛 아래 누군가는 여전히 일을 할 것이고, 밥을 짓고 티브이를 보고 사랑도 하겠지. 얼굴 모르는 이들이 쏘아 올리는 불빛, 작은 삶의 신호들, 그 신호들이 매일 밤 도시를 밝히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화해 보이던 야경이 조금 슬퍼 보였다.


바람이 점점 거칠어지고 서쪽 끝에서 번쩍 번개가 보였다. 금세 빗방울이 떨어질  같아 걱정인 나와 달리 물리 교사 출신인 동료는 과학적 분석이라며 최소 2시간 안에는 비가  확률은 없다고 단언했다. 과학자의 말을 믿는 우리는 다시 느긋해진다. 인왕산 산에  때마다 전직 물리교사는 우리에게 과학을 가르치려 노력한다. “저녁노을은  붉을까?”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대답한다. “퇴근길이니까 한잔  했나 보죠?” “ 동안 부끄러운 꼴을 너무 많이 본거 아닐까?” “ 무슨 사연이 있겠지요.”


아름다운 저녁 풍경은 물리적 법칙에 따른 것이겠지만 사람 사는 풍경에는 물리적 법칙이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주장이 가득 적힌 서류 뭉치를 받아 들을 때마다 이 말을 한번 해보면, 어떻게든 시작해 볼 엄두가 난다. 저마다의 사연 때문에 다 이러는 거라고.. 퇴근 후 인왕산에 오르는 일은 지니를 부르는 주문 같은 것이다. 산, 풀, 꽃, 글, 말, 땀, 나의 지니는 이런 곳에 깃들어 있다. 누구나 스스로를 돌보는 자신만의 주문이 필요한 것 같다. 노란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심을 내려 보며 실없이 주고받는 농담을 하는 사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없이 가벼워졌다. 바람을 타고 인왕산을 내려갈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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