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오도 Oct 23. 2021

쉽고도 어려운 인권 감수성

감수성

“인권감수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권위 조사관으로 오래 일했다는 이유로 인권감수성 교육에 강사로 초빙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정말 곤혹스럽다. 그럴듯한 답변을 하고 싶지만, 사실은 나도 배워가고 있다는 하나 마나 한 답을 내놓고 꼬리를 감추게 된다. 그래도 아는 대로 대답해 달라고 하면 덧붙이는 이야기는 이 정도이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 장애인 인권활동가들이 지하철 철로에 쇠줄로 몸을 묶고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었다. 그 당시 지하철에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마다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걸 이용하던 승객이 굴러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계속되었다. 휠체어의 무게나 작동방식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리프트를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법과 제도의 문제 이전에 인권 감수성이 있었다면 휠체어 리프트를 그런 식으로 설치해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안전 문제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리프트가 이동할 때마다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괴상한 음악 때문에 승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하는 이용자의 마음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리프트를 제작한 누군가에게 인권 감수성이 조금 더 있었다면 쓰레기 수거용 차량이 후진할 때 나올 법한 기계음을 그런 식으로 도입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인권활동가들 덕분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이지만 휠체어보다는 유아차 사용자가, 노인과 짐을 든 사람이, 임신부가, 때때로 나처럼 바쁜 직장인들이 더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도 인권 감수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에 멈추지 않고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려고 하는 이가 있다면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이런 비유를 들어 아는 척을 하지만 사실 인권은 참 어렵다. 인권 감수성은 더 어렵다. 영화 ‘도가니’를 통해 세상에 잘 알려진,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조사할 때였다.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서 재학생과 졸업생을 불러 1박 2일 워크숍을 진행했다. 조사관들과 학생들의 라포 형성을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상처 받은 피해자들을 위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담당 조사관의 노력으로 상당한 예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한 리조트에서 조사관들과 성폭력 전문가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뛰고, 놀고, 웃는’ 시간을 보냈다. 음악을 틀고 막춤을 추는 시간도 있었다. 청각장애인은 귀로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몸으로 느꼈다. 비트가 강한 음악이 만드는 진동을 맨발로 느끼며 마음껏 춤을 췄다.


모두 수화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그곳에서 수화를 전혀 모르는 나는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수화로 대화하는 사람들의 현란한 손동작과 풍부한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그들의 의사소통 세계에서 나의 언어는 쓸모없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수화로 얘기할 때도, 문을 여닫을 때, 분노나 즐거움을 표현할 때도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숙소의 문은 수시로 꽝꽝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여닫혔다. 그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나 같은 비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이 대화할 때 서로를 얼마나 골똘히 쳐다보는지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수화를 읽기 위해서 상대가 ‘말하는’ 동안은 온전히 상대에 집중해야 했다. 처음에는 낯선 소음 때문에 놀라기도 했지만, 점차 익숙해졌고 소음에 주의하지 않는데서 오는 묘한 쾌감도 있었다. 이틀에 불과했지만, 나도 그들처럼 소음에 걱정하지 않고 웃고 손뼉 치고, 문을 꽝꽝 여닫아 보았다. 장애가 있어서 불편한 이유는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세계가 비장애인 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임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본격적인 피해자 면담 조사에 앞서 간단한 설문지와 진술 용지 돌렸다. 참가자들이  설문지와 진술서를 정리하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처음 한글을 배운 외국인이   같은 글씨체와 잘못된 맞춤법으로 구성된 이상한 문장들이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워크숍 내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던 그들이 작성한 글이라고 도저히 믿을  없었다. 나는 어쩐지 속은 느낌이 들었고, 막대한 예산이 사용된 워크숍의 결과가 고작 읽기도 어려운 진술서인가 싶어 속이 상했다. 이런 나의 불평을 눈치챈 인권활동가가 부드럽게 알려주었다.


“조사관님 그거 아세요?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를 배우는 것은 청각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글을 쓰고 읽는 건 영어 말고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불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죠. 그러니까 수화로 대화하는 것은 유학도 안 가고 동시통역사가 된 사람과 같은 거예요. 대단하죠? 제아무리 뛰어난 동시 통역사도 외국어를 몇 개씩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나요? 비장애인의 기준에서 피해자들이 쓴 한글이 서툴고 문법이 틀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2외국어로 그 정도 해냈다면 정말 훌륭한 것 아닐까요?”


불만은 금세 부끄러움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식으로 조금씩 ‘알아차리며’ 인권 감수성을 키워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권은 법이나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제도나 법 역시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인권 감수성이 없다면 실천되기 어렵다. 편견을 버리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말랑말랑한 마음이 법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말하는 것이 인권 감수성이 아닐까?

이전 13화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