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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Nov 16. 2020

남자들은 모르는 밤길의 공포

조심해,라고 인부를 물을 때

숙박 출장이 많은 편이다. 출장을 가면 특별시는 7만 원, 광역시는 6만 원, 그 외의 지역은 5만 원의 숙박비가 지원된다. 남자 조사관들은 현지에서 모텔 외관만 보고도 잘 곳을 쉽게 결정하는 것 같은데 내 경우 그게 그렇게 어렵다. 비즈니스 급의 괜찮은 호텔이 있으면 몇만 원의 사비를 추가해 숙박하지만 그런 선택도 어려운 지역이 많다. 최근에는 몰래카메라 범죄도 무서워 웬만하면 늦게라도 귀가하는 게 몸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하다. 이런 나를 보고 선배 조사관이 농담했다. “모텔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거 아닙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은 장소인데 위험할 게 뭐 있겠어요? 하하” 부적절한 농담이 기분 나쁜 것보다 남자인 그가 여자의 공포를 감도 잡지 못한다는데 놀랐다.


신문에서 트랜스 여성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공포에 대한 감각도 성차별의 결과임을 새삼 확인했다. 그는 남성으로 사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밤길의 공포를 여성으로 살면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육체적으로 여전히 강건하고, 군대에서 배운 무술 실력도 그대로인데, 성전환 후부터 밤길이 무서워졌다고 했다. ‘남자로 살던 시절’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라고 했다. 가끔은 어릴 때 남동생들처럼 태권도를 배웠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위험한 상대를 만나면 주먹으로 얼굴을 갈기고, 퍽퍽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릴 수 있다면, 밤길은 말할 것도 혼자 여행도 자유롭게 하고, 출장 때마다 안전한 숙소를 찾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여성들이 느끼는 (성)폭력의 공포는 무술을 연마하여 힘을 키운다고 해서, 물론 조금 도움은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느끼는 공포가 개인적 과민함이나 유약함 때문이 아니라 보통의 여성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각이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작은 위안을 얻었다.


여성들에게는 매우 보편적인 이런 공포를 보통의 남자들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도 아이를 키우면서 매번 확인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란다.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잔소리할 때마다 "네네 어머님" 하며 농담으로 받던 아들이 어느 날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엄만 밤길이 그렇게 걱정돼? 내가 길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여자인 엄마가 평생에 걸쳐 느껴왔던 공포심을 아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보통의 남자들이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십 대 중반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강도를 당한 적이 있다. 비 오는 밤길에서 갑자기 누군가 내 등을 덮치고, 두툼하고 끈적끈적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손가락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한지 얼굴을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고, 무기력하게 지하 주차장 쪽으로 끌려갔다. 그 순간 순찰 중인 경비 아저씨가 주차장 쪽으로 플래시를 비추지 않았다면, 그날의 순찰이 몇 분만 더 늦게 시작되었다면, 나는 그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평일 낮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극장 안에 남성 관객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정 좌석에 앉지 않고 그들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는데, 영화가 시작되자 한 남자가 내가 앉은 라인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나는 남자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느라고 영화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바로 영화관을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 너무 오버하지 말자, 설마 공공장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며 마음을 다독였지만 작은 바스락거림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두 남자가 공범이면, 혹시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고 성추행을 한다면? 하는 식으로 상상이 확대되었고 영화관에 앉아 있기는 했지만, 영화를 감상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의 이런 두려움은 현존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삶을 실제로 위축시킨다.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여성을 피해자로 한 살인사건과 (성)폭력 사건들은 매일매일,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진다. 끔찍하게도,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범죄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운이 좋기 때문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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