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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Mar 08. 2021

일의 기쁨과 슬픔

짝짝이 신발을 신고서

인권위에서 조사관으로 일하기 전에 서울 YMCA 시민중계실에서 근무했다.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스물일곱 되던 해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시민단체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용감한 결정이었는데, 이십 대여서 그랬는지 활동비 40만 원이 월급을 대신한다는 사실이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고, 시민단체 활동가들 역시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했던시절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일의 기쁨'을 맛보던 시절이기도 했다.


수원시 정자동에서 살던 나는 화서역에서 종각역까지 왕복 3시간을 출퇴근했다. 당시 국철은 일주일에서 몇 번씩 중간에 고장으로 멈춰 서곤 했고, 냉난방도 잘 안 되고 플랫폼에 안전문도 없던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잠깐 정차하는 사이 시베리아 칼바람이 들이닥쳐 지하철 안이 냉동고로 변했다. 출근은 보통의 직장인들과 같았지만, 퇴근은 밤 10시에 해도 빠른 기분이 들 정도로 일은 끝도 없이 많았다. 모처럼 해가 훤할 때 퇴근한 날은 우리 빌라 입구가 하도 낯설어 한참이나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계속되는 야근으로 주말이면 죽처럼 녹아내려, 누룽지가 될 때까지 방바닥에 딱 붙어 있곤 했지만, 월요병이 뭐냐고 물을 정도로 일터에 나가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그때 나를 그토록 신나게 했던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부조리한 사건과 억울한 사연을 끌고 오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신날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알량한 지식과 노동이 누군가의 삶을 조금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종각역에 있는 YMCA 건물 416호, 그 작은 사무실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정말 다양한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왔다. 불법 다단계 업체에 빠져 등록금을 날린 대학생들이 반품할 자석요를 들고 왔고, 전셋집이 경매되어 평생 모은 전세금을 날리게 된 집 없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방문판매로 산 수백만 원어치 건강보조식품을 들고 온 퀭한 눈의 노인들, 법원에 낼 간단한 답변서를 쓸 줄 몰라 억울한 추심을 당하게 된 사람들, 사법 피해자와 의료 사고 피해자들…. 마땅히 기댈 곳 없던 별별 사연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우리를 찾아왔다. 언제나 도떼기시장 같던 그곳에서 우리는 확정일자 제도와 임차보증금 우선 반환 제도 같은 전세금 보호 방법을 상담하고 답변서를 대신 써줬다. 원가의 수십 배를 챙기는 대기업 교복업체의 담합을 고발하는 대규모 집단 소송으로 교복값 일부를 돌려받았다. IMF로 어려워진 삶의 불안에 파고드는 불법 다단계 업체와 끝없이 싸웠고 멋진 성과를 만들어 냈다. 무엇 하나 쉽게 처리되는 것은 없었지만, 정말이지 지칠 줄도 모르고 일을 즐겼다. 비둘기 똥으로 얼룩진 작은 창과 날개에 시루떡 같은 먼지가 낀 환풍기 하나에 바람과 빛을 의지한 작은 사무실에서, 우리는 해가 지는지, 눈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전화받고 면담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보도자료 써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몇 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11월의 어느 늦은 밤이었던  같다. 수원행 국철에 앉아 졸다 깨다 하다가 언뜻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해 자세히 보니, 짝짝이였다. 양쪽이 검은색 구두였지만 한쪽은 굽이 3센티쯤 있는 단화였고, 다른 쪽은 굽이  낮고 발등이 높은 구두였다. 짝짝이 신발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철은 벌써 서울 경계를 한참 지나가고 있었고 남아 있는 승객도 거의 없었다. 물끄러미 맞은편 창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공연히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얼마나 대단한 삶을 살겠다고 짝짝이 신발을 신은 줄도 모르고 하루를 살았을까? 종일 까맣게 잊고 있던, 시댁에 맡겨 놓은  지난 아들이 보고 싶었다. 아마도 그날, 시민단체에서 일한  처음으로, 기쁨으로 충만하던 나의 노동에 미세한 생채기 하나를 발견했던  아닐까 싶다. 그날로부터  해쯤 지나 YMCA 시민중계실을 그만두고 인권위로 옮기며 시민운동가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대의만을 생각하다가 잃어버린  삶을 찾고 싶었다고  수도 있고 어쩌면 작은 상처를 핑계로 영영  무거짐을 떨쳐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인권위 조사관의 일과 416호에서 하던 일은 어떤 면에서 같은 연장선에 있다. 사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좋은 환경에서 더 분명한 권한을 갖고 일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가끔 416호 그 시절이 선명하게 그립다. 그 방에 중요한 무엇을 남겨두고 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더 날것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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