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풍경들
인권위가 있는 을지로의 점심 풍경은 닭장에서 도망친 중닭들이 퍼드덕거리며 뛰어다는 것처럼 어수선하면서도 명랑하다.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 앞에 긴 줄을 만드는, 매화 같은 해사한 얼굴의 직장인들 덕분이다. 12시 직전의 인권위 로비는 한바탕 ‘사랑의 작대기’가 펼쳐진다. 로비에 횡렬로 서서 기다리는 조사관들을 뒤늦게 나온 이가 ‘픽업’하여 총총히 사라진다. 누가 누구와 점심을 먹는지 일주일만 조사(!)하면 인권위의 인간관계도와 사회성 지수를 거의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서너 사람과 돌아가며 점심을 먹는 유형에 속한다. ‘업무상 먹는 밥’이 노동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윗분들이 ‘업무추진비’로 사주는 오찬은 조용히 핑계를 대로 빠진다.(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한다면, 제일 먼저 가서 가장 끝자리에 앉는다) 사람은 직위가 높아질수록 혼밥을 싫어하는 것 같다.(혼밥을 싫어해서 직위가 높아진 건가?) 혼밥을 싫어하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 ‘챙김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20년째 ‘내 돈 내산’으로 밥을 함께 하는 몇몇 동료들은 진짜 나의 ‘식구’들이다.
코로나 이후 일주일에 한두 번 집 근처 스마트워크 센터에서 일한다. 원격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인권위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집중해서 보고서를 쓸 수 있고, 왕복 2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줄일 수 있어 좋지만, 직장인의 제일의 즐거움인 점심시간을 혼자 맞아야 한다. 을지로 점심의 주인공이 발랄한 직장인들이라면, 스마트워크 고양센터가 있는 화정역의 점심은 할머니들이 주인공 같다. 화정역 앞은 고양시 일대 텃밭에서 길러진 작물을 팔러 나온 할머니들로 늘 분주하다. 봄이면 빨간색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쑥, 냉이, 달래 같은 봄나물이 담기고, 여름과 가을에는 고추, 가지, 콩, 들기름 같은 것이 담겨 팔린다. 이 작은 시장은 인근 건물의 직장인들과 아파트의 주부 손님들로 점심시간이 되면 더 분주해진다. 할머니들은 한가하게 쉬는 법이 없다. 손님이 없을 때는 굽은 손으로 고구마 줄기를 까고, 쪽파나 도라지를 다듬는다. 손주 녀석 세수시키는 것 같은 할머니들의 손길을 거친 작물들은 모두 다 귀엽고 예쁘다. 한 할머니가 들고 나온 총각무 다발이 하도 예뻐서, “할머니 총각무로 꽃다발을 만드신 것 같아요”라고 말해드렸다.
좌판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말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할머니들도 많다. 나는 점심마다 일부러 그 앞을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전단지를 받곤 한다. “할머니 그 전단지 저 주세요.” 하면 어떤 할머니는 “예쁜 아가씨 고마워,”라고 말해주신다. 전단지 한 장 받고 아가씨 소리를 들은 나는 기분이 흠뻑 좋아져서 그 자리를 서너 번 더 왔다 갔다 한다. 점심이 끝날 무렵이면 에코백에 전단지가 수북하게 쌓인다. 전단지를 나눠 주면서 “바르면 무조건 예뻐지는 화장품 사용”이라고, 마치 자동 반복 녹음기처럼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만났다. 회원제로 하는 마사지 숍을 홍보하는 중이었는데, 아마도 전단지 배포할 때 그런 멘트를 말해 달라는 의뢰인의 요청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르면 무조건 예뻐지는 화장품이 있다면 나도 바르고 할머니도 하나 바르면 좋겠다는 싱거운 생각을 했다.
햇살이 따스해서, 롱스커트 아래 맨다리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데 춥지 않았다. 천천히 역 주변을 걷다가 잠시 멈춰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이라 하늘은 희뿌옇게 보였다. 주변 상가 건물들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간판들도 눈에 들어왔다. 낙지 전문점, 은행, 베트남 쌀국수, 금은방, 커피숍, 헬스장, 미장원, 안경점, 더 위 쪽으로는 모텔과 피시방의 간판도 보였다. 빌딩 앞면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간판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띄기 위해 가능한 크고 선명하게 간판을 만들고, 아이 이름 짓듯 상호를 지었을 것을 상상하니 그 보기 싫던 도심의 간판들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 가는데, 역 주변 공사장의 노동자들이 벤치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다. 점심밥은 먹고, 낮잠을 자는 것인지, 작업복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다. 점심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가도 1시가 되면 몸은 저절로 시간을 감지한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이, 이쯤 되면 돌아가야 한다고 느껴지면 정확히 12시 55분이다. 몸이 알아서 시간에 반응한다. 노동의 시간이 몸에 새겨진 탓이다.
수채화 같은 우리 몸의 세포 사진. 우리 몸은 3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사진을 보도하는 기사는 우리 모두는 ‘저 마법 같은 가능성으로 가득 채워진 존재’라고 쓰고 있다